주간 정덕현

‘그해 여름’, 당신도 아프셨나요? 본문

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그해 여름’, 당신도 아프셨나요?

D.H.Jung 2006. 11. 24. 15:57
728x90

시대적 트라우마를 찾아 나선 멜로들

2006년 가을을 시작으로 우리네 멜로는 한 가지 흥미로운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하 우행시)’에서 슬쩍 그 감성을 내보이더니, ‘가을로’에서는 얼굴을 드러냈고, 이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그것을 완성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멜로드라마가 사회적인 문제와 만나는 지점, 멜로라는 개인적인 사건이 사회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파괴되는 지점, 아픔을 안고 있는 현재가 그 아픔의 진원지인 과거를 쫓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멜로 영화들은 왜 그 사회적인 문제를 혹은 그 아팠던 시대를 찾아가고 있는 것일까.

당신을 울린 것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하는 기본적인 멜로의 틀은 부단히도 실험을 거듭했다. 눈물을 빼기 위한 최루성 멜로를 그려냈던 우리 식의 신파들이 비판에 직면했을 때, 우리에게 일본식의 멜로드라마는 그 자체로 참신함을 주었다. ‘러브레터’로 대변되는 이 일본식 멜로드라마는 이른바 ‘가면을 쓴 멜로’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일본식 정서에 부합하는 ‘감정 숨기기’를 보여주었다. 이것은 토로식의 신파 멜로에 식상해진 관객들에게는 세련된 멜로로 보여졌다. 물론 최루성 멜로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또 한 갈래가 헐리우드식의 로맨틱 코미디이지만 이것은 궁극적으로 눈물보다는 웃음에 방점을 찍는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들 멜로드라마들은 사회극과의 퓨전을 통해 전혀 새로운 형식을 도출해내고 있다. ‘우행시’에서 보여주었던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의 줄타기는 ‘가을로’에 와서는 절제된 멜로드라마와 사회극 사이에서 벌어진다. 그리고 ‘그해 여름’에 와서는 다시 신파와 사회극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 ‘우행시’에서의 실험을 좀더 멜로로 완성시킨다. 사회적인 아픔과 개인적인 아픔이 교차되면서 발생한 것은 눈물의 층위가 다양해졌다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인 멜로드라마 속에서 눈물을 흘리다가 갑자기 시대의 아픔 같은 것을 공유하는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엮어 가는 사랑의 특징은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문제로 인해 장벽을 맞이한다는 데 있다. ‘우행시’에서 그것은 가난과 사형제도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고, ‘가을로’에서 그것은 재난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해 여름’은 이제 60년대 말 사회적 상황을 그 장벽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은 사랑하지만 사회는 그들의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이것도 역시 넓게 보면 신파의 한 틀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자 관객들이 가지는 감정은 단순한 슬픔의 차원을 뛰어넘는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못했다는데서 오는 눈물 속으로 울컥 치솟아 오르는 무언가를 느낀다. 바로 분노이다. 분노의 감정과 슬픔이 교차하면서 멜로가 주는 눈물의 강도는 높아진다. 특히 시대적 아픔을 함께 살아왔던 사람들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들은 아팠던 과거를 쫓는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그 아팠던 시간으로의 동행을 시작한다. 현재의 나는 과거 그 시간 속에서 잠시 잊고자했던 기억들을 다시 끄집어낸다. ‘우행시’에서의 과거가 달동네와 가난 같은 것에 있었다면, ‘가을로’는 구체적인 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이것은 단지 삼풍백화점뿐이 아니다. 당대 있었던 각종 재난사건들로 인한 사회적 분위기를 총체적으로 상징한다)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또한 ‘그해 여름’에 와서는 간첩사건과 학생운동이 치열했던 60대 말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시대적 아픔은 그 자체로 눈물의 원천이 된다. 따라서 영화가 일단 시대상황을 살짝 보인 후에 그것을 더욱 극적으로 하는 방법은 최대한 시대적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우행시’는 보다 신파쪽에 무게를 둠으로써 이런 방식을 채택하지 않지만, ‘가을로’와 ‘그해 여름’은 바로 이런 ‘가리는 방식’으로 멜로를 극대화시킨다. ‘가을로’가 백화점 붕괴사건이라는 충격적인 장면이 잠깐 나온 연후에 바로 로드무비 형식으로 그 사건을 빠져나와 아픔을 얘기하는 방식을 채택한 반면, ‘그해 여름’에 와서는 첫사랑이라는 이야기로 흘러가다가 시대적 아픔이라는 장벽을 맞닥뜨리게 하는 방식을 채택한다. 이렇게 해서 두 영화는 모두 무거운 사회극이라는 외피를 벗고 멜로의 옷을 입는다. 그러나 이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감정 선을 따라가는 멜로 영화의 특성상 이 영화들 내내 지속되는 감정의 힘은 바로 그 사회적 상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돌아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이 영화들이 과거(혹은 현재도 지속되는 과거)를 다루고 있지만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현재에 있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알게 모르게 깊이 각인된 시대적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 누구도 닦아주지 않았던 그 아픔을 누군가 끄집어내 주었을 때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감정에 젖게 된다.

아픔을 겪었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트라우마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멜로라는 외피를 입었을 때는 느슨해지기 마련이다. 그 느슨함 속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상처를 다시 보면서 눈물 흘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이들 영화들이 취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멜로적인 접근(사회문제의 개인화)은 비판의 소지가 있지만, 또한 그것은 최소한 외면했던 트라우마를 마주보게 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기능을 하기도 한다. 문득 돌아보면 쏟아질 것만 같은 눈물에, 앞만 보고 달려오면서 점점 표정 없는 얼굴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이 영화들은 잠깐 돌아보라고 말한다. 그해 여름의 아픔이 지워버린 아름다운 추억까지 다시 돌아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