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선덕여왕’을 기점으로 앞으로의 사극은?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선덕여왕’을 기점으로 앞으로의 사극은?

D.H.Jung 2009. 12. 24. 07:26
728x90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은 ‘선덕여왕’, 사극의 향방은?

1999년 ‘허준’에서 비롯된 사극의 퓨전화는 2003년 여성사극 ‘대장금’을 통해 그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성사극의 등장과 성공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전통적인 사극의 시청층이 남성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버렸고, 여성들이 즐기는 사극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렸다. 또한 선 굵은 남성사극들(주로 전쟁사극이나 정치사극)과 달리, 섬세함이 주 무기가 되면서 여성 사극 작가들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다. ‘대장금’, ‘선덕여왕’의 김영현 작가가 대표적이고,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대왕세종’의 윤선주 작가, ‘이산’, ‘동이(2010년 방영예정작)’의 김이영 작가 등이 모두 여성 사극 작가들이다.

여성들이 그리는 여성 사극은 당연히 여성성을 담아낸다. 여성이 주인공인 경우가 많고, 남성이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남성 속에는 여전히 여성성이 들어가 있다. 사극은 인물의 심리나 사건 전개가 보다 디테일해졌고, 감성 또한 풍부해졌다. 일련의 여성사극들은 과거에는 다루지 않았던 역사의 뒤안길에 서있는 여성들을 역사로 끌어냈다. ‘대장금’이 그랬고, ‘황진이’가 그랬으며, ‘이산’(이 작품은 정조라는 인물의 인간적인 모습과 성송연이라는 여성이 역사 위로 올라왔다)이 그랬다. 이러한 여성 사극 속의 인물들이 성장드라마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억압받는 존재가 여성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 성장은 여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2009년 여성사극들은 이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했다. ‘천추태후’나 ‘선덕여왕’처럼 여성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남성들을 거느리는 여성 카리스마의 등장은 그간 여성사극들이 보여준 일련의 자신감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곳까지 올라간’ 이 여성들의 영웅담을 담은 작품들이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는 야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천추태후’와 ‘선덕여왕’은 결이 달랐다. ‘천추태후’가 여성을 주인공으로 세웠지만 남성적 세계를 반복한 ‘무늬만 여성사극’의 한계를 드러냈다면, ‘선덕여왕’은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잘 그려냈다는 점에서 실질적인 여성 사극의 정점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실(고현정)과 덕만(이요원)이 때론 대결하고 때론 토론하면서 보여준 여성적 카리스마의 세계는 여성들은 물론이고 남성들까지 매료시켰다.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고 있는(혹은 여성성의 사회로 바뀌어가야 되는) 현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성별을 넘어서 이 사극이 보여주는 여성적 카리스마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미실의 억압적이면서도 적까지 끌어안을 줄 아는 포용력은, 남성적 사회의 잔재와 여성적 세계관이 공존하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 사람들을 꿈꾸게 하고 때론 모성으로 사람들을 대하는 덕만의 모습은 온전한 여성적 카리스마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덕만이 그 여성적 카리스마로 여왕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리네 여성 사극 역시 어떤 정점에 오른 것이 분명하다.

재미있는 것은 여성사극이 일궈온 일련의 성장곡선이 여성사극 속에서 여성 주인공이 거치는 성장과정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여성사극에서 주인공의 성장이 어떤 정점에 올라갈 때, 그 사극은 오히려 위기를 맞게 되는 경우가 많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 여왕의 자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내리막길을 밟았다는 것은, 이제 정점에 서게 된 여성사극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제 어쩌면 성별은 무의미해졌고, 오히려 여성사극이 가진 일련의 장점들, 예를 들면 성장드라마나 섬세한 심리묘사, 혹은 입체적인 캐릭터 같은 요소들이 오히려 여성적인 강박을 버리는 지점에서 새로운 사극의 진화가 시작될 거라는 점이다. 여성들만큼 남성들도 섬세하게 그려질 것이고, 왕에서부터 노비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인물들이 신분적 위계에 갇히던 과거와는 달리, 동등한 눈높이에서 그려질 가능성이 높다.

퓨전사극으로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버리고, 여성사극으로 신분과 성별이 가진 한계를 넘어버린 사극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다시 서고 있는 중이다. 그것은 스타일을 입은 장르화의 길이 되기도 하고(‘추노’가 대표적일 것이다), 아직까지는 잘 다루어지지 않는 중세와 근대가 섞여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되기도 하며(‘제중원’), 여전히 여성들의 시선을 끌어 모으는 여성의 성장 드라마(‘동이’)가 되기도 한다. 2009년 ‘선덕여왕’이 여성사극의 정점을 찍음으로써, 2010년의 사극은 좀 더 다양한 실험의 장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