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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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사극 '명가', 왜 성공하지 못했나

D.H.Jung 2010. 2. 20.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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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 착한 메시지의 힘, 계몽적인 시선의 한계

'명가'에서 주인공 최국선(차인표)에게 그 부친인 최동량(최일화)은 "내가 너로 인해 큰 깨달음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그는 '청빈(淸貧)'의 길만이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국선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다 같이 잘 사는 '청부(淸富)'의 길 또한 가치 있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는 것. 이 최동량의 대사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해 설명해준다.

'명가'는 '함께 잘 사는 길'을 고민하고 그 방법을 모색하는 사극이다. 병자호란으로 피난 온 사람들에게 곶간을 열어 구휼죽을 베풀면서 가세가 기울어 버린 집에서, 가난을 타개해 보고자 최국선은 집을 나서 저자거리로 간다. 거기서 그는 장길택(정동환)을 만나 그 상단에 들어가 돈을 벌지만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던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반계수록'의 저자인 유형원(이기영)이 준 깨달음 덕분이다. 그는 밥상 위에 여러 반찬을 올려놓고 그것을 이리 저리 옮겨 놓은 후, "이것이 바로 장사"라고 말한다. 즉 장사란 물건을 이쪽 저쪽으로 옮겨서 이문을 남기는 것일 뿐이라는 것. 즉 밥상 자체를 풍성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장사가 아니라 농사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그의 멘토이자 할아버지인 최진립(장영철)이 유언을 대신해 남긴 '쌀되'는 국선의 뜻을 더욱 공고하게 한다. '쌀되'는 바로 '농사의 길'을 말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함께 사는 길'을 상징하는 오브제다. 세금으로 이자로 민초들의 식량을 수탈해가는데 사용되는 그 '쌀되'는 국선의 손으로 오자, 흉년에 구휼죽을 나눠주는 도구로 바뀐다.

'명가'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이 최국선의 삶을 통해 볼 수 있듯이 분명 착한 것들이다. 이 메시지가 승자독식의 사회, 흔히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는 현재에 던지는 무게감은 적지 않다. 그런데 왜 '명가'는 대중적인 성공을 거둘 수 없었을까. 이야기가 너무 착해서였을까.

문제는 이 착한 메시지가 어떤 방식으로 제시되었는가에서 생겨난다. '명가'가 '청부의 길'을 제시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교훈적이고 지나치게 도식적이다. 최국선에게 부친인 최동량이 깨달음을 말하는 장면은 물론 흐뭇한 설정이지만, 그것은 지나치게 설명적이다. 최국선은 물론 조선 후기에 농업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실제 인물로 현재에도 큰 의미를 던져주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정작 이 꿈을 함께 일궈나가는 민초들을 자세히 조명하지 않는다. 민초들은 늘 가난함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심지어 죄까지 저지르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그런 그들을 긍휼히 생각하고 품에 안는 최국선의 모습은 뭉클한 것이지만, 그 방식에 있어서 민초들은 지나치게 수동적인 존재들로 그려진다.

이 착한 메시지를 가진 드라마가, 그 선함을 의심받게 되는 이유는 능동적이고 선구적인 일인과 대다수의 수동적인 민초들이 대비되며 나타나는 그 계몽적인 시선 때문일 것이다. 즉 우매한 민초들은 선견지명을 가진 한 인물에 의해 구원받아야 한다는 그 시선이 주는 뉘앙스가 현재의 능동적인 대중들에게는 어떤 거부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결국은 부의 축적을 전제로 한다는 것, 그래서 자칫 잘못하면 부의 명분으로서 세워지기도 한다는 것을 이 시대의 대중들은 이미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착한 사극 '명가'의 실패는 드라마 속의 최국선이 그러하듯이 현재의 대중들을 계도하고 가르치려는 그 태도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