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더러운 세상, '제중원'의 꿈, '추노'의 꿈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더러운 세상, '제중원'의 꿈, '추노'의 꿈

D.H.Jung 2010. 2. 26. 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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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세상, '제중원'과 '추노'의 동상이몽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박성광이 개그콘서트에서 외친 이 말은 이제 유행어가 됐다. 반 농담처럼 앞에 각자의 답답한 심사를 수식어로 붙이고 "~하는 더러운 세상!"이라 말하면 빵빵 터지는 세상이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 저마다 다르겠지만 이 유행어는 작금의 세상에 대한 불만, 특히 힘 있는 자는 잘되고 힘 없는 자는 안되는, 잘 사는 사람은 더 잘 살고 못 사는 사람은 더 못 사는, 게다가 이것이 태생적으로 결정되고, 빈부에 따른 교육에 의해 확정되는 세상에 대한 불만을 담아낸다.

올 초부터 일련의 사극들이 저마다 천민의 삶에 집중하면서 어떤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 우연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작금의 세상이 점점 벌어지는 '삶의 격차'에 대해 그만큼 민감해져 있음을 실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중원'이 구한말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추노'가 병자호란 이후의 극심한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는 이유는 그 시기가 모두 신분의 격변기였기 때문이다. '제중원'은 천민 백정으로 한계 지워지는 더러운 세상에 태어나 의사가 되는 신분 상승의 사극이며, '추노'는 반대로 천민으로 전락한 자들이 '더러운 세상'과 저마다 부딪치는 사극이다. '제중원'이 긍정의 드라마라면, '추노'는 부정의 드라마다.

'제중원'은 백정과 양반이 다른 동네에서 살아가는 조선사회에 선교사 알렌을 등장시켜, 양반 백정이 똑같은 의생의 제복을 입고 의학을 공부할 수 있는 제중원이라는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변화의 가능성이다. 이미 왕은 서양 문물에 호의적이며 어떤 면에서는 이 계급사회가 변화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석란(한혜진)에게 "정진하라"고 왕이 말하는 장면은 조선사회에서 여성에게까지 사회적으로 쓸모 있는 일을 권장한다는 측면에서 파격적이다.

이미 '제중원'이 그리는 시대는 양반 상놈의 계급 구조가 흔들리고 있었고, 중인으로서 역관인 유희서(김갑수) 같은 인물이 왕과 독대하는 시대였다. 따라서 이 백정이 의사가 되는 성장과정에 주목하는 '제중원'이, 성장 또한 태생이나 배경으로 결정되어버리는 작금의 상황에 어떤 판타지를 제공한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시대는 어쩌면 거꾸로 흘러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좀 더 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추노'로 가면 천민이 양반이 되는 성장의 판타지 따위는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건 수 세기의 세월을 건너왔지만 또다시 마주하게 되는 절망적인 현실이다. "사극은 과거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를 그리는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곽정환 감독은 '추노'라는 수 세기 전에 벌어졌음직한 이야기 모티브를 통해 작금의 상황을 다차원적으로 들여다본다. 그것을 쳐다보고 있는 것은 잔혹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만큼 힘겹다.

송태하(오지호)와 이대길(장혁)이 서로 칼과 주먹을 휘두르며 싸우는 장면은 이 사극이 가진 비극성을 잘 드러내준다. 송태하는 "왕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이대길은 한 때 종이었던 혜원(이다해)을 사랑하며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꿈 꿨던 인물이다. 하지만 송태하는 혜원이 종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직까지 잘 모르고 있으며, 이대길은 절망 속에서 그 꿈을 묻어둔 지 오래다. 그러니 그들은 정작 자신이 칼을 겨눠야 할 장본인을 찾지 못한다. 이대길이 송태하를 잡아오고, 그런 이대길을 이경식(김응수)이 다시 잡아들이는 설정은 토사구팽의 전형을 보여준다. 토끼와 사냥개는 어쩌면 같은 옥사에서 자신들이 싸워야 될 공통의 적, 즉 사냥꾼을 찾게 될 지도 모른다.

송태하와 이대길이 전락한 위치에서 자신들의 적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을 때, 그 명확한 적을 보여주는 인물들은 상놈의 세상을 만든다는 취지로 모인 노비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업복이(공형진)를 저격수로 세워 '더러운 세상'을 만들어낸 양반놈들을 저격한다. 그런데 여기서 업복이의 의구심은 이 사극이 단지 '세상을 전복하는 낭만적인 혁명의 판타지'를 꿈꾸지는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업복이(공형진)는 초복이(민지아)와 함께 밤길을 걸으며 묻는다. "양반 상놈이 뒤집어지는 세상보다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이 더 나은 것 아니냐"고.

업복의 말은 이상적이지만 그것이 어찌 쉬울까. 그 말에 초복은 "그것도 좋지만 그 전에 (자신과 가족이 당했던) 복수는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것은 감정을 가진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마음일 것이다. 혁명이 어려운 것은 뜻을 모으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렇게 모인 뜻에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뒤섞이기 때문이라고 '추노'는 말하는 듯 하다.

가까운 과거를 다루는 '제중원'에서 판타지를 느끼고, 더 먼 과거를 다루는 '추노'에서 오히려 작금의 현실을 느끼는 상황은 어딘지 잘못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은 점점 나아지지 않고, 그대로이거나 악화되고 있고, 그래서 더더욱 판타지에 열광하게 되는 '역행하는 시대'를 거기서 발견하기 때문이다.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젊은 세대들에게 G세대라고 일컬으며 그 영광의 판타지를 일반화하는 동안, 한편에서는 여전히 취업의 문 앞에서 좌절하고, 그 문 안에서도 88만원의 비정규직으로 살얼음판을 걸어가야 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천민 취급 받는 세대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