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지붕킥’, 그 절망적 희극과 희망적 비극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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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 그 절망적 희극과 희망적 비극

D.H.Jung 2010. 3. 18. 2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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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의 희비쌍곡선, 김병욱표 화학실험의 결과물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 이것은 흥미로운 김병욱표 화학실험이다. 꽤 부유하게 살아가지만 온기나 찰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순재 가족. 그 가족 속으로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들어온다. 그 하나는 산골에서 갓 상경해 갈 곳 없는 순도 100% 무공해 자매, 세경과 신애이고, 다른 하나는 서운대생으로 약간의 허영기를 갖고 살아가는 황정음과 그 집에 함께 자취하는 친구들(인나와 광수, 줄리엔)이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전형적인 성공한 도시 청년의 표상처럼 그려지는 지훈은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 속에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불쑥 자신의 마음 한 구석으로 들어온 정음을 발견한다. 서울대생이라 속인 서운대생에, 술만 마시면 떡실신에 주정을 부리는 그녀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지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집안 사정이 나빠진 정음이 이별통보를 했을 때, 지훈은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수동적으로 그 아픔을 받아들일 뿐이다.

한편, 그는 늘 자신 옆에 자신을 챙겨주는 인물로 서 있는 세경을 발견하지만, 그렇게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그 무신경함이 그녀를 상처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상처를 입은 그 상황 속에서 결국 그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말한다. 사랑이 누구와 이루어지고 누구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가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이 무신경한 사내가 이제 타인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준혁(윤시윤)은 반항기 가득한, 그래서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자신의 세계로 틈입하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며 살아가던 인물. 그러나 그는 정음을 통해 각별한 우정을 갖게 되고, 세경을 통해 사랑을 알게 된다.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준혁은 결국 이 우정도 사랑도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절규한다. 누군가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던 그는 이제 누군가를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

세경은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간다. 식모라는 상황은 그녀가 이순재의 집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때론 상황이 역전되어 세경과 신애로 인해 이 온기 없는 집안이 따뜻한 가족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지만(그녀는 진짜 엄마처럼 이 가족들의 밥을 챙긴다), 그것이 그녀의 종속된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끝없이 지훈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차츰 지훈과의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나간다. 이민이라는 상황은 물론 역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다.

정음은 생각 없이 청춘을 소비하던 삶에서 치열한 삶으로 선회한다. 아버지의 파산선고가 그 결정적인 이유지만, 어쩌면 그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순재의 집으로 준혁의 과외선생을 하러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그 변화는 이미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이별과 아픈 현실의 힘겨움이 동시에 찾아왔지만, 그것이 비극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정음 역시 과거의 그 정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흘렀고, 처음 시작했던 지점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성장해있다. '빵꾸똥꾸'를 외치며 독하기만 해 보이던 해리(진지희)는 이제 떠나려는 신애를 붙들며 "넌 아무데도 못가"하는 아이로 성장해 있고, 찌질한 청춘을 연명하는 것 같았던 인나와 광수 커플도 인나가 걸 그룹으로 데뷔하면서 광수와 떨어지게 되자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김병욱표 화학실험은 이처럼 이질적인 존재들을 한 공간으로 섞어 넣음으로써 어떤 희망의 표지를 찾아내려 애쓴다.

시트콤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화학반응을 통해 어떤 성장을 그려낸다는 것은 이 시트콤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규정한다. 처음 이순재의 집이 갖고 있는 도시인의 차가움은 말 그대로 시트콤이 가질 수 있는 풍자적인 웃음의 보고나 다름없다. 그 어딘지 부족한 인물들은 그대로 웃음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성장하지 못한(혹은 도시생활 속에서 성장이 멈춘) 인물들은 시트콤이라는 과장의 프리즘 속에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해리는 지독할 정도로 '빵꾸똥꾸'를 외치고, 지훈은 지나치게 무신경하며, 정음은 술만 마시면 떡실신되는 무개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웃음을 주는 차가운 현실 속의 인물들은 세경과 신애 같은 인물들이 투입되고 차츰 관계의 화학반응을 거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멜로로 극대화되어 있는 이 정극적인 요소는 차츰 초반부의 희극을 후반부의 비극으로 이끌어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초반부의 희극이 차가운 현실의 절망을 풍자하면서 생겨난 것처럼, 후반부의 비극은 거꾸로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의 희망을 향한 성장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절묘한 희비극의 쌍곡선이 바로 '지붕킥'을 통해 김병욱 PD가 실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후반부에 이르러 여러 악재들로 인해 일련의 흐름이 깨어지면서 그 균형에 균열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붕킥'이 시도하려 했던 희비극을 통한 현실의 직시와 그 속에서 시도된 희망의 모색이 가진 가치는 폄훼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정극과 비교해 늘 낮게 취급되던 시트콤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을 뛰어넘으려는 김병욱 PD의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실로 뒤얽힌 남녀 관계에 대한 관심과 결론에 대한 과열된 추측은 시트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웃기던 캐릭터들은 저마다 한 차원씩 성장했고, 희극은 차츰 진지해져갔으며 그 사이 시트콤도 우리가 늘 생각해오던 그 위상에서 한 차원 높아졌다. 지붕 아래 있던 그 모든 것들은 실로 그 견고하게 굳어있던 지붕 하나를 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