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역사의 갑옷 벗은 ‘주몽’, 사극마저 버리나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역사의 갑옷 벗은 ‘주몽’, 사극마저 버리나

D.H.Jung 2006. 12. 7.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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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역사를 날 것 그대로 꺼내 보여준다면 재미있을까. 예상은 부정적이다. 그래서일까. 역사에 상상력의 날개를 달고 퓨전사극이 각광받는 시대가 됐다. 퓨전사극의 계보는 과거 ‘다모’, ‘대장금’, ‘해신’ 등에서부터 내려오고 있지만 최근 열풍의 진원지는 역시 ‘주몽’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주몽’이라는 강력한 민족적 자긍심을 자극하는 소재에,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고 더 전개가 자유로워진 퓨전사극이라는 형식이 맞물린 결과다.

결과적으로 시청률면에서 승승장구한 주몽은, 최근 연장방영에 대한 논란들마저 연착륙시켰다. 이례적으로 MBC 신종인 부사장은 인터뷰를 통해 “그간 거듭돼온 방송사의 고무줄편성에 대한 시청자들의 우려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주몽 만큼은 끝까지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각인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인터뷰가 나온 지 채 1주일도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른바 ‘신물 3종 세트’가 논란이 되면서 ‘주몽’은 “이러려고 연장했냐”는 누리꾼들의 비판에 직면해있다.

드라마 ‘주몽’은 시청률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미 스케일 문제나,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억지설정, 고구려 건국보다는 부여패망에 더 집중되어 있는 듯한 전개구성 등등 완성도에 있어서 수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데 이번 이 문제로 인해 ‘주몽’은 완성도의 비판 위에 그 정체성까지 의심받게 되었다. 그것은 과연 이 드라마를 더 이상 사극으로 봐야하는가의 문제다.

환타지 같은 전개와 환타지 그 자체는 다르다
‘주몽’이 시작과 함께 호평을 받은 것 중 하나는 그것의 전개가 게임이나 환타지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 유사한 재미를 준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주몽’은 그 배치된 인물과 이야기 전개에 있어서 거의 롤플레잉게임을 닮았다. 시작부터 완성된 영웅이 아닌 단계적으로 미션을 완수하면서 업그레이드되는 영웅, 점점 강한 아이템을 얻어 가는 과정, 반지의 제왕을 연상케 하는 갑옷들 등등 그런 것들은 실제 게임과 환타지를 즐기는 젊은 시청자들의 입맛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것이 과도했던 걸까.

최근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출연과 그 출연과정에서 보여준, 사극이라 하기엔 과도한 환타지적인 요소, 게다가 그녀가 주몽에게 제시한 “다물활 이외의 남은 두 개의 신물” 발언은 지금까지 위태롭게 유지해왔던 사극의 틀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과거 ‘주몽’의 환타지적인 요소를 굳건히 사극의 틀로 붙잡아두고 있던 인물들은 여미을을 중심으로 한 신녀들이었다. 그것은 과거 신권과 왕권이 혼재된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역사 속 실재인물들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왕자들간의 경합에서 나온 다물활 에피소드는 여미을 신녀의 신탁만 있었을 뿐, 실제로 다물활의 어떤 환타지적인 능력을 보여준 바는 없다. 이것은 전부 여미을 신녀가 하는 말을 통해 그 상징적 의미가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한 일식이 일어나는 에피소드에서 역시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사건 위에 여미을의 예언이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여전히 환타지가 아닌 사극의 범주 안에 놓일 수 있었다. 그러나 여미을이 죽고 사라져버린 예언의 힘 때문일까. 비금선 신녀의 갑작스런 등장(그것도 이해하기 어려운 빛과 연무에 휩싸인 화려한(?) 등장)은 그 선을 넘어버렸다. 게다가 그 신녀의 목적은 새로운 신물을 찾으라는 퀘스트의 제시이다. 이로써 ‘주몽’은 환타지적인 전개와 환타지 사이에서 하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넘어버린 격이 됐다.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과거에 이런 문제가 나올 때마다 드라마 제작자들이 숨는 지점은, ‘이 드라마는 퓨전사극’이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퓨전사극의 한계는 어디까지를 두고 봐야 하는 것일까. 퓨전사극이 주목받는 시대라 마치 정통사극은 역사, 그 자체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다. 하지만 물론 사극 역시 역사가 아니다. 말 그대로 역사를 극화한 것이 사극이기 때문이다.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왜곡이 아닌 이상 대세에 지장이 없다면 사극으로 수용되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 더 나가 퓨전사극으로 넘어가면 이건 좀더 복잡해진다. 그 한계를 어디까지 두어야 사극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아직까지 여기에 대한 분명한 기준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가 판단할 수 있는 잣대는 상식뿐이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삼국지’를 창작물로 생각하지만, 그 안에 들어있는 역사 자체가 상상의 산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수호지’의 경우에는 조금 다를 수 있다. 대부분의 인물들이 가상으로 설정된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역사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을 법한 개연성을 갖고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유기’는 다르다. 이것은 역사를 넘어서 완벽한 가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지’와 ‘수호지’가 역사소설에 가깝다면 ‘서유기’는 환타지에 가깝다. 이 역사소설과 환타지 사이가, ‘주몽’이 지금까지의 여타 사극들과 다르게 위치한 지점이다.

과거에도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주몽’은 이 서유기적인 면모를 보인 바가 있다. 드라마 인물들의 유기적인 전개가 이루어진 결과가 아닌, 신탁에 의해 준비되어진 결과는 시청자들을 실망시킨다. ‘주몽’의 사극제작에 있어서‘사료가 없다’는 것은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상식을 넘어서는 공상이나 환상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는 저 무협영화에서 주인공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볼 때 처음엔 즐거웠으나, 차츰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 되는 주인공들’에 식상해진 경험이 있다. 퓨전사극은 여전히 사극이며 환타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사극으로 기대하고 있던 드라마가 그 경계를 넘어버릴 때 시청자들은 사극의 땅에 발을 딛지 못하고 허공에 붕 뜨게 된다. 퓨전사극처럼 그것이 땅이 아닌 허공에 매달린 줄이라고 해도, 떠오른 몸은 다시 줄로 내려앉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 한 판 줄타기의 소재가 어느 시대나 한두 번쯤 나올 수 있는 그런 인물의 이야기가 아니라는데 있다. 이건 우리 모두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오던 그 신화적 인물, 주몽에 대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