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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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은 어떤 스토리를 좋아하셨을까

D.H.Jung 2010. 3. 19.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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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

우리에게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고 떠난 법정 큰 스님이 평생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숲과 바다 같은 그 자연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자 그대로의 뜻으로 ‘스스로 그러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어떤 인위적인 흐름이 부여되지 않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자연이고, 그것을 우리는 숲과 바다와 나무 같은 자연을 통해 발견한다. 자연의 흐름이란 실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즉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약해지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법정 큰 스님은 우리에게 이 자연적인 삶을 거스르지 말고 그 흐름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무소유’는 자연이 자연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 인간이 스마트폰 같은 새로운 장비를 자꾸만 개발해 무장하는 것은 맥루한 식으로 얘기하면 ‘감각의 확장’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다. 즉 스마트폰은 외부적인 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확대시킨다. 시공간은 이 장비를 통해 바로 내 눈앞으로 당겨진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들의 속성이다. 기계들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다. 내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것은 내 힘을 키워주고, 내 시야를 넓혀주고, 내 귀를 뚫어주며, 내 손발을 더 빠르게 무장시켜준다.

왜 이런 장비들을 개발해 감각을 확장시키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단지 숲을 파괴하고 에너지를 확보한다는 그런 식의 외부적인 자연에 대한 침탈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하나의 자연으로서 한계 지워진 육신의 삶을 정복한다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멀리 있는 것을 눈앞으로 당겨놓는 기기를 개발하고, 내가 짧은 시간 내에 갈 수 없는 공간을 가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개발한다. 이것은 과연 성장일까. 파괴일까. 여기에 대해 법정스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진 자는 가난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부자입니다.”

인위적인 것이 들어와 무언가를 확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연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싫어도 성장해야 하고, 싫어도 노쇠해야 하며, 싫어도 죽어야 한다. 태어나는 것? 그것은 아예 우리의 선택권도 아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에 이르러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늘 당신이 자연의 삶을 살기 위해 정진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큰 스님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거꾸로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 자연의 흐름, 법칙은 사실 우리네 스토리 속에 그 유전자를 남기고 있다. 스토리의 가장 오래된 구조이자 여전히 가장 강력한 구조가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흘러가는 것은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짜 ‘자연’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즉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일 뿐이지, 자연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연은 사실 정해놓은 법칙이 없다.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굴러가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법칙을 읽으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인간들의 노력일 뿐이다. 자연은 심술궂게도 어느 봄날 난데없는 눈을 내리기도 하고, 어느 겨울날 따뜻한 햇살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어떤 흐름은 있지만, 그 흐름은 늘 변수를 지닌다. 즉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바로 이 차이, 즉 자연의 무차별적인 흐름과 그 흐름 속에 내던져진 인간 사이에 놓여진 차이에서 스토리가 탄생한다. 스토리는 일어난 일들을 해석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탄생했다. 맥락 없이 내던져진 정보들, 즉 자연은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어느 날 갑자기 낙뢰에 맞아 사람이 죽거나, 홍수에 터전이 휩쓸리는 것이 바로 자연의 흐름이다. 사실 죽음이 아무런 맥락 없이 찾아온다는 것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자연이 주는 근원적인 공포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맥락 없는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은 그저 삶을 방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공포의 무차별성을 해결해준 것은 스토리다. 곧 죽을 것만 같은 긴긴 겨울 끝에 봄이 온다는 전언, 그 희망을 전해준 것. 무차별적인 흐름에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질서를 부여해 삶을 지탱해준 힘. 그 스토리의 구성이 자연을 닮아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스토리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장르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련의 스토리의 흐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는 드라마다.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 속에 스토리가 완결되지만, 드라마는 길게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스토리가 흘러간다. 대체로 잘 되는 드라마들의 특징은 그 스토리가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즉 인위적으로 이리저리 작가에 의해 끌려 다니는 드라마는 부자연스럽기 마련이고 그것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자연스러움’이 바로 무차별적인 자연의 법칙 속에 불불 떨며 서 있는 인간을 위로하고 희망을 꿈꾸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진짜 ‘자연의 진실’은 아니었을 지라도.

법정 스님이 드라마를 즐겨 보셨을 리 만무다. 그 텅 빈 오두막집에는 전기조차 호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범박하게 말해 드라마가 하나의 스토리라면, 법정 스님이 좋아하셨을 스토리는 대충 알 것 같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법정 스님 또한 스스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스토리 한 편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에 가까운 삶의 스토리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오롯이 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바람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이야기. 이 스토리가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 역시, 그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보는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드라마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반문해보라. 당신 삶의 드라마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