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자이언트', 그 흥미진진한 복마전의 세계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자이언트', 그 흥미진진한 복마전의 세계

D.H.Jung 2010. 6. 23.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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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이언트',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대조영'을 닮았다

'자이언트'는 지금껏 우리가 개발시대를 다루던 시대극이라고 하면 으레 떠올리던 것과는 결을 달리한다. '자이언트'를 '에덴의 동쪽'이나 '야망의 세월'의 연장선으로 바라봤던, 그래서 이 시대극이 국책성 드라마가 아닌가 하던 그 의구심은 전혀 다른 드라마 진행으로 인해 봄날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자이언트'가 닮은 것은 '야망의 세월'이 아니라 오히려 장영철 작가의 전작인 '대조영'에 가깝다. 하나의 땅덩어리를 차지하기 위해 끝없는 음모와 암투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도 모를 정도의 복마전으로 벌어지는 세계. 그것이 '자이언트'다.

사극 속의 영토는 이 시대극으로 와서는 강남땅으로 바뀌었다. 개발을 앞두고 누가 그 땅의 개발권을 차지하느냐가 이 개발 시대에 벌어진 전투이고, 또 그 개발예정지를 땅값이 오르기 전에 누가 더 많이 차지하느냐가 이 전투의 승리를 가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하철 공사권을 대륙건설에 빼앗긴 후 절치부심하던 조민우(주상욱)가 지도를 보면서 노선을 바꾸는 것으로 역세권의 땅을 매입해온 대륙건설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장면은 전형적인 사극 속 전투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이 강남땅에서는 때론 조폭들을 앞세운 분쟁지에서의 실제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고, 이 영토 전쟁에서의 장군 격인 건설사 대표들과 참모들의 끝없는 음모가 자행되기도 한다. 정치인들과 건설사 대표들 간에 경쟁적으로 벌어지는 로비와 정보전은 그러나 이 전쟁이 그 땅에 살아갈 우리네 민초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위해 전쟁을 벌일 뿐, 국민들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벌어졌던 대부분의 전쟁이 그러하듯이.

장영철 작가가 생각하는 전쟁이란 우리가 그저 낭만적으로 생각하는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다. 그것은 어쩌다 말려든 싸움 속에서 끝없이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이고, 그 싸움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똑같은 욕망의 화신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초반부 황태섭(이덕화)이 매립지 공사를 사이에 두고 대륙건설의 홍기표(손병호)와 대결구도를 벌일 때, 마치 황태섭이 선이고 홍기표가 악인 것처럼 드라마가 흘러가던 것을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후에 홍기표가 이미주(황정음)를 돌보는 인물임이 드러나고, 황태섭 역시 이 전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는 모습을 보이는 과정 속에서 이러한 선악 구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것은 악의 화신인 조필연(정보석)과 민홍기 국장(이기영)이 벌이는 대결구도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한 때 '대조영'이 보여주었던 그 '양파 껍질 같은 대결구도'의 현대판이다. 당장에는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지만 껍질 하나를 벗겨내면 그 구도가 180도 바뀌고 또 벗겨내면.... 이 집요한 진흙탕 싸움은 굉장한 극적 재미를 만들어주는 것인 동시에,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화려한 강남의 마천루가 얼마나 더럽고 피가 철철 흐르는 복마전을 통해 세워진 것인가'를 잘 드러내주는 요소들이다. 그 진흙탕 싸움 위에 원치 않게 생존을 위해 서게 된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는 이 욕망의 싸움을 옳다 그르다 판단하는 존재들이 아니다. 과장되지도 미화되지도 않은, 그저 그 싸움 속에서 한 시대를 살아낸 가족의 한 표상일 뿐이다.

낚시를 하고 있는 강남의 큰 손에게 홍기표가 돈을 빌리러 오는 장면은 그래서 이 시대극이 말하려는 대부분을 간략하게 축약해낸다.

"오늘따라 입질이 없구나."는 큰 손의 푸념. 그러자 이어지는 홍기표의 말.
"썩은 물에서 고기가 나올 리가 없죠. 예전엔 이곳에서 고기가 제일 잘 잡혔었는데.."
"이렇게 만든 게 당신들이잖소. 강남을 개발하면서 가장 먼저 망가진 게 바로 이 한강이니까."하고 말하는 큰 손. 그러자 신념에 찬 듯 말하는 홍기표.
"강을 다시 살릴 수 있는 방법도 개발밖에는 없습니다." 거기에 반박하는 큰 손.
"그건 당신들 생각이지. 사람들 마음까지 혼탁해진 건 어떡하고."

이 대사들이 마치 개발시대의 한 시점에서 오고간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에 일어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바로 이 부분은 이 시대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지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