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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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네모난 세상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않을까

D.H.Jung 2010. 9. 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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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사실은 명명백백해 보인다. 하지만 사실이 가진 힘이 너무나 약해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타블로의 이야기다. 한 네티즌에 의해 제기된 학력의혹은 타블로 당사자에게 처음엔 우스워보였을 지도 모른다. 왜 그렇지 않을까. 분명 자신은 대학을 나왔다는데 누군가 나오지 않았다고 얘기한다면 그건 좀 심한 농담처럼 들릴 것이다. 하지만 연예인으로서 언제든 그런 일을 당할 수 있다고 여겨온 타블로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않는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자신은 가만히 있는데 언론들이 네티즌이 제기한 학력의혹을 기사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언론들은 점점 경쟁적으로 이를 기사화하면서 여기에 대응을 하지 않는 타블로를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그러자 그 '수상함'은 곧이어 '사실'로 둔갑한다. 뒤늦게 타블로는 결국 사실을 제시하면 모든 일이 종료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몇 가지 증거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웬걸? 사실들은 오히려 의혹을 더 증폭시킨다. 이 놀라운 마술 상자는 증거를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커다란 의혹으로 돌아오는 힘을 보여주게 된다.

왜 한 쪽은 사실이라고 증거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데, 다른 한 쪽은 그것이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타블로를 믿지 못하는 걸까. 결국 사건은 검찰에게까지 가게 되었다. 상황은 아직 종료된 것이 아니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이 타블로 사건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우리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이 어떻게 변화해가고 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타블로 본인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 연예인들(실제로 현재 몇몇 연예인들은 이 소통의 문제로 심한 곤란을 겪고 있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같은 일반인에게도 중요하다.

우리는 팩트(fact)의 시대에서 스토리(story)의 시대로 변화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팩트의 시대에 사실 그 자체는 권위를 가진 것이었다. 즉 증거 제시는 그 자체로 사건의 일단락을 맺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스토리의 시대에 상황은 달라졌다. 팩트는 그저 스토리의 재료가 될 뿐이었다. 따라서 이런 정보들이 소문에 의해 증폭되고 변질되는 사건 속에서 그것을 막기 위해 던지는 팩트란 오히려 스토리만을 더 크게 만들기 마련이다. 어째서 이런 왜곡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진원지는 정보의 과잉이다. 팩트의 시대에 정보들은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지 않았다.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인터넷처럼 그 정보를 그대로 보여주는 매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TV나 라디오 같은 매체는 자체적으로 정보가 생산되는 매체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인터넷은 다르다. 이 매체 속에서는 과거 수용자로 존재하던 대중들이 스스로 정보를 생산해낸다. 그래서 정보는 과잉일 수밖에 없다. 이 정보의 과잉은 이제껏 우리가 알 필요도 없었던 어떤 이들의 사적인 생활까지를 정보로 끌어들임으로써 정보를 더욱 과잉되게 만들었다.

연예인이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일반인들의 사생활이 노출되어 정보로 생산되는 시대. 그리고 이미 트위터나 미니홈피 등으로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혼재가 일반화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이 무수히 많아진 정보의 홍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본능적으로 한 가지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다.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쏟아지는 정보들은 아무런 가치도 가지지 못한 채 쓰레기(공해)가 되어버린다. 마치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들이 있다고 해도 그 별과 별 사이에 어떤 선을 그어서 별자리가 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는 것처럼.

이 정보의 선별과 맥락 잇기의 과정이 바로 팩트가 스토리가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 인터넷이라는 무수한 정보의 별들이 쏟아지는 공간에서 중요해진 것은 그 별이라는 팩트 자체가 아니고, 그 별과 별들이 이어지는 스토리의 별자리다. 카더라 통신이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그 통신이 제공하는 스토리가 그럴 듯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블로 사건처럼 그 스토리가 사적인 영역을 침투해들어갈 때 그 힘은 더욱 강해진다. 즉 팩트의 시대에 진실처럼 보였던 공적인 영역은 이미 스토리의 시대로 들어오면서 깨져버렸기 때문이다.

인터넷이 일반화되면서 연예인들의 신비주의화 경향이 무너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더 이상 신비주의 콘셉트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사적 영역이 보호될 수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대중들이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깊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따라서 공적으로 발표된 자료에 대해 사적인 의심이 제기될 때, 그 스토리는 더욱 진짜처럼 믿어지게 된다. 간단히 말하면 사적인 내밀함을 정보가 드러낼 때(혹은 드러내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정보의 신뢰성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것은 우리가 종이신문의 콘텐츠를 대하는 것보다 블로그나 트위터의 콘텐츠를 더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거기에는 아주 사적인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하다못해 제품의 기능에 대해 어떤 전문가가 연구결과를 토대로 쓴 신문의 정보들보다, 한 주부가 직접 쓴 사용기가 더 신뢰가 높아진 시대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토리의 시대가 진실을 매도하는 시대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스토리가 가진 힘은 역기능보다는 순기능이 더 많다. 스토리는 혹독한 현실을 이겨내는 힘이다. 우리가 꿈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대부분 스토리를 통해 구체화된 것들이다. 이러한 맥락잇기의 과정을 통해 우리 인류가 발전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우리 시대에 제기되고 있는 스토리화의 문제는 아주 작고 사소한 부작용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나쁜 스토리가 나쁜 미래를 가져오듯이 좋은 스토리는 더 좋은 미래를 가져올 수 있다.

팩트의 시대에서 스토리의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기 때문에 지금 인터넷은 진통을 겪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중요한 것은 이 스토리의 시대에 대한 이해다. 어떤 정보의 왜곡이 벌어졌을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식을 이제는 스토리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왜곡이 벌어진 그 사실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왜곡이 말해주는 스토리를 읽어야 한다. 즉 타블로 사건에서 팩트(사실)는 학력의혹이지만 그 밑바닥에 깔린 스토리는 병역문제나 국적문제에 닿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걸 안다면 어떻게 자신이 가진 진실을 대중들에게 전해주어야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지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언론에서 이런 문제가 불거졌을 때, 늘 하는 태도로서 몇몇 네티즌들을 악플러로 몰아가는 자세 역시 문제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해 사건의 발단을 만든 장본인은 합당한 법적 제재를 받아야 하겠지만, 그렇다고 싸잡아 모두를 악플러로 모는 것은 소통을 불통으로 만드는 행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사실이 중요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다. 이제 사실 뒤에 놓여진 스토리를 바라봐야 하는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