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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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남녀', 임창정이어서 가능한 멜로란?

D.H.Jung 2010. 11. 8. 0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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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정표 로맨틱 코미디, '불량남녀'

‘불량남녀’에서 임창정은 여타의 작품에서 늘 그래왔듯이 어딘지 궁지에 몰리는 사내다. 강력계 형사로 칼과 주먹이 난무하는 폭력의 현장에서도 굳건히 살아가지만, 30분마다 울려대는 빚 독촉 벨소리에 신경 쇠약 직전에 놓인다. 신용사회에서 신용불량자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충은 실로 묵직한 것이지만, 이런 아픔이 풍자가 뒤섞인 코미디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임창정의 공이다. 그는 그저 조금 맥 빠진 얼굴로 서 있기만 해도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하는 능력을 지녔다. 그것도 진한 페이소스가 묻어나는.

‘불량남녀’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인 메시지에 로맨틱 코미디가 엮여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진 피도 눈물도 없는 돈에 대한 집착은 하나의 시스템이 되어 있고, 그 시스템 위에 김무령(엄지원)은 빚 독촉하는 카드사 채권팀 사원으로 살아간다. 김무령은 살아가기 위해 독하게 신용불량자 방극현(임창정)을 달달 볶아댄다. 그래서 이 시스템 위에서는 두 남녀가 불량한 존재들이 된다. 하나는 신용이 불량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성이 불량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것은 이 두 불량한 존재들이 서로 실체로서 마주할 때이다. 전화상으로는 마치 기계와 얘기하듯 극한 말들이 오고가지만, 서로 눈을 마주치고 서 있을 때는 얘기가 달라진다. 거기에는 자신이 칼침 같은 독한 말을 던지는 상대가 인간으로 버젓이 서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 속의 두 불량한 남녀가 시스템 속에서 서로의 실체를 모른 채 돈을 매개로 칼침 같은 말을 던지다가, 차츰 서로를 알아가고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멜로의 과정이면서도 시스템을 고발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30분마다 독촉 전화로 지긋지긋해진 전화기는 이제 서로가 서로를 알게 되면서 그 벨소리를 기다리게 되는 전화기로 바뀐다. 사라진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일은 이제 방극현이라는 강력계 형사에게는 범죄자들의 격투보다 더 힘겨운 일이 된다. 전화기에 대한 달라진 방극현의 태도는 이 영화가 가진 미디어에 대한 풍자까지를 담아낸다. 편리해진 통신수단 위로 날아드는 무수히 많아진 스팸들이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하는 것은 아마도 거기에 인간적인 마음이 거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말과 통신수단이 매개하며 발생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의 문제는 방극현과 김무령의 만남에서부터 사랑의 결실이 이루어지는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진지하면서도 코믹하게 전개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임창정만이 가진 독특한 매력 덕분이다. 어딘지 B급 같지만 그래도 잡아당기는 힘이 있고, 그래서 그다지 큰 기대 없이 보게 된 후에는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것. ‘불량남녀’는 그 임창정만의 매력이 한껏 발산된 영화다.

극중에서 마지막 프로포즈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달려온 한 여고생은 "그런데 남자가 좀 더 잘생겼으면 좋았을 걸"하고 말한다. 바로 이 장면은 '불량남녀'라는 영화와 임창정이라는 아이콘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정확히 설명해준다. 사실 멜로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임창정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할 정도의 외모를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바로 그 점 때문에 '불량남녀' 같은 어딘지 소외된 이들의 사랑이야기에 임창정 만큼 어울리는 인물도 없다. 그저 바라보면 어딘지 '불량(?)'해 보이지만 보면 볼수록 인간적인 매력이 넘쳐나는. '불량남녀'는 그런 임창정이기에 가능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