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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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할 건가

D.H.Jung 2011. 2. 13. 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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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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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과연 시나리오 작가군에 한정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땅에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앞뒤 꽉 막힌 삶을 버텨내야 하는 88만원 세대 전체의 비극일까. 비정규직으로 통칭되는 이 사회의 부조리일까. 혹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가려져왔던 비극은 아닐까.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고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간 최고은씨처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화판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1년 내내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작업을 하고 고작 300만원이란다. 그런데 실제 영화판 얘기를 들어보면 그나마 300만원이라도 받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받는다는 얘기다. 뭐 하나 명함 내밀 것 없이 영화가 좋아 이 판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그런 용돈(?)조차 없다고 한다. "한 번 해봐"하고 부추기고, 곶감 빼먹듯이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빼서 투자자들에게 던져놓고는 잘 안되면 "네 실력 탓"이라고 말하는 게 부지기수란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판에서 오로지 시나리오만을 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입봉이 걸려있는 연출 파트쪽에서 일을 하는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계약금이라는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를 착수금조로 몇 달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 영화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나은 편이 감독인지라,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스텝들도 대부분 감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딱히 감독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감독이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비일비재한 부조리한 일처리 방식들은 악명 높기 이를 데 없다. 마치 대단한 거라도 주는 것처럼 취업에 목마른 영화 지망생들을 꼬드겨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린다거나, 3개월 찍고 제작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 찍으며 다 찍어야 돈을 준다고 한다거나, 마치 금방이라도 영화화 될 것처럼 시나리오 작가를 부추기고는 몇 년 동안 작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놓는다거나... 이것은 시스템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업계에 있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회사 같은 시스템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봉이 적더라도 어떤 룰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있는 건, 단지 영화판만의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종 공모에서 당선되었다고 해도 드라마판에서 이런 신예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신진들이 그나마 숨통을 틜 수 있었던 단편 드라마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인들에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미 뜬 기성작가들에만 몰려드는 제작 분위기는 큰 문제로 지목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런 투자 개념 없이 대박만을 노리는 상황을 "비겁한 짓"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속에서 신예 작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기획안들이 편성을 잡아내기 위해 방송사로 속속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미 검증된 작가들만이 겨우 그 바늘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톱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지만 신인 배우들은 새롭게 자리를 차고 들어갈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요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 역시 이런 신인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이 되려는 가수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그들을 키워내는 기획사의 문은 좁기 때문에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해도 일단 채용만 되면 이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대형기획사들은 그래도 그나마 과거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편이다. 팬들이나 대중들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이 기획사 시스템에까지도 넓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기획사의 생리상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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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

하지만 가요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기획사 중심의 가요판에 가려진 그림자가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그토록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 청춘들 앞에 놓여진 장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88만원 세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청춘들은 기성사회로의 진입로가 막혀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회가 자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돈을 쥔 자본주들이 신인을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진출한 기성인(기성작가, 기성배우, 기획사 가수, 경력자들)들에게 몰두하고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젊은 피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문화계까지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이 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젊은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당장에는 한류다 OECD다 하면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사회가 신인들의 사회 진입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청년 실업 같은 작금의 청춘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갈 것인가.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가 가슴 아프고 심지어 화가 나는 건, 그 죽음 앞에서까지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화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주는 반듯함 때문이다. 왜 그녀는 화라도 내지 않았던가. 아니 어떤 현실이 그녀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잘못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대로 놔두면 장차 벌어질 대중문화의 죽음을, 또 나아가 사회의 죽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