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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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스토리스토리

때론 고립을 즐기자

D.H.Jung 2011. 3. 14.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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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에 대한 첫번째 기억은 'MBC 스페셜'이라는 프로그램이다. 카메라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그 프로그램은 우리가 평소에 발견하지 못하는 것들까지 세세하게 우리 앞에 던져 놓았다. '곰배령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그 다큐멘터리는 나를 단박에 매료시켰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한 번 곰배령 가볼까?"하고 물었고 아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휴식년제에 들어간 곰배령은 사람들의 발길을 허락하지 않는다, 지만 그래도 가려면 갈 길은 있다. 그 해에는 민박집 주인 아주머니가 곰배령 안에 사는 분의 이름을 가르쳐주면서 입구에서 그분을 만나러 왔다고 얘기하고 들어가라고 일러줬다. 우리 가족은 그 패스워드를 정확히 불러주었고, 그 입구를 막고 있는 관리인은 들어가라고 해주었다.

참 이런 자연이 없었다. 사람 발길이 없어서 그런지 모든 게 생생한 야생이었다. 산을 잘 오르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래도 그 날은 꾸역꾸역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중간에 비가 내리는 바람에 아내와 막내는 낙오했지만, 나와 딸내미는 꼭대기에 올라 사진도 찍었다. 곰이 누워 있는 모양이라 붙여진 이름, 곰배령. 그 느낌만큼 편안함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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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기억이 워낙 좋아서였던 지 다시 곰배령에 가자는 내 얘기에 가족들은 모두 들떠 했다. 그래도 겨울인데 눈이라도 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러면 또 눈을 즐기면 되지 않나 하는 호기까지 생겼다. 묵을 펜션은 '강선산방'이라는 곳으로 아예 곰배령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지나 30분 정도 걸어야 닿는 곳이었다.

차를 세우고 들어가니 녹지 않은 눈길이 별천지 같았다. 펜션도 좋았고 주인 내외도 친절했다. 그 날 밤 누운 자리에서는 하늘의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처럼 넘쳐났다. 그걸 가슴 한 가득 품으며 잠이 들 수 있었다.

다음 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야호 했다. 그런데 눈이 계속 내렸다. 그치지 않고...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눈사람을 만들고 삽으로 눈을 파서 눈썰매도 타면서 아이들은 신나했다. 그런데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렸고 거의 1미터에 가깝게 쌓여 버렸다. 마침 주인 내외는 딸내미가 대학을 졸업한다며 출타중이었고, 그 외진 집에는 우리 가족만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할 수 있는 건 그저 눈을 보고 밥을 먹고 산방이(그 곳을 지키는 멍멍이다)에게 밥을 주는 일이었다. 핸드폰이 되지 않는 지역이라 외부와 완전히 고립된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밥을 챙겨먹고 여전히 그치지 않는 눈을 맞으면서 길을 나서려는데 옆집 총각이 산방이 밥을 주겠다며 집을 찾아왔다. 그 총각에게 "와도 너무 눈이 많이 오네요." 했더니 글쎄 이 총각이 해맑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좋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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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렵게 곰배령을 탈출했다. 푹푹 빠지는 눈 덕에 주차장까지 걸어오는 길이 너무나 멀게 느껴졌고, 주차장을 가득 뒤덮은 눈은 도저히 차를 빼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감을 주었다. 어찌 어찌 차를 빼고 비포장길을 달리는 그 순간순간은 생과 사를 오가는 아찔함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빠져나와 비로소 눈을 다 녹여놓은 도로로 올랐을 때, 내 머릿 속에는 계속해서 그 총각의 "좋잖아요!"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사실 뭐 불안할 게 있었을까. 조금 고립되더라도 조금 고생하더라도 그 자체를 사실은 좀 즐기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곰배령을 빠져나오면서 그동안 막혀 있다 뚫린 댐처럼 휴대폰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메시지들의 홍수를 들으며 한편으로는 좀 아쉬워 했었다는 거. 늘 저쪽과 연결되어 있기를 욕망하면서도 때론 완전한 고립을 꿈꾸는...

하긴 그런 기억이 또 있다. 어느 해 산사에 가서 겪었던 그 기억. 시간이 흐르고 나니 그 고립은 너무나 달콤한 것으로 남게 되었다.

월정사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있다. 어둑해진 밤에 도착한 나는 스님께 하룻밤 묵을 수 없겠냐고 물었다. 하루 방세로 대신 시주를 하고 스님이 안내해준 방에 들어갔다. 방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TV도 없고 라디오도 없고 장롱도 없고 소파도 없는 그 방에는 덩그러니 이불 한 채만 놓여 있었다. 처음에는 어색했던 것이 차츰 익숙해지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유는 뭐였을까. 있는 것으로 특징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것으로 특징되는 그 방이 주는 편안함. 산사의 밤은 고요했다. 불을 끄자 하늘에 별이 지천이었다. 모든 게 꺼진 듯한 그 기분. 완전한 어둠과 고요 속에서 나는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 들어온 것처럼 깊고 단 잠을 잤다. 그 때 내 머리 위에 늘 곤두세워져 있던 안테나도 꺼졌다. off. - '가끔은 꺼두셔도 좋습니다'(숨은 마흔 찾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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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배령 대탈출..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