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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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출생이 로또인가, 출생에 목매는 드라마들

D.H.Jung 2011. 3. 23.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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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불꽃'(사진출처:MBC)

알고 보니 재벌가 숨겨진 자식? '출생의 비밀' 없이는 드라마가 안되는 걸까. 한때 비판을 받으며 사라지는 듯 했던 드라마의 '출생의 비밀' 코드가 이제는 드라마의 필수적인 항목으로 자리하는 느낌이다. '욕망의 불꽃', '웃어라 동해야', '호박꽃 순정', '신기생뎐', '폭풍의 연인', '마이 프린세스'처럼 아예 출생의 비밀 코드를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는 물론이고, '드림하이', '프레지던트' 같은 드라마에도 양념처럼 출생의 비밀은 등장한다. 물론 사극도 예외는 아니다. '선덕여왕'에서도 비담이 사실은 미실의 자식인 것이 뒤늦게 밝혀지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 정도는 드라마적 흥미를 위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최근 시작된 '짝패'는 아예 전면에 출생의 비밀을 내세운다. 같은 날 양반의 자제와 천민의 자제가 동시에 태어나는데, 양반 자제의 모친이 죽게 되자 천민 자제의 모친이 양반 자제의 유모가 된다. 그 유모가 자신의 아들과 양반 자제를 바꿔치기 하면서 서로 엇갈리는 운명이 펼쳐진다.

'출생의 비밀' 코드가 점점 드라마 전체에 사용되게 된 것은 이만큼 시청률을 견인하는데 좋은 장치가 없기 때문이다. 작년 국민드라마의 반열에 올랐던 '제빵왕 김탁구'는 대표적이다. 회장님의 아들이지만 어린 시절 내쳐져 스스로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다뤘다. '자이언트'는 물론 출생의 비밀을 그대로 다루지는 않았지만, 변형된 형태의 이 코드가 등장한다. 즉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진 가족이 성장한 후 다시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실제로 이 드라마는 가족이 상봉하는 그 지점부터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이처럼 '출생의 비밀' 코드 밑바닥에 깔려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흩어졌던 가족의 만남'이다. 즉 '출생의 비밀' 코드 밑에는 우리네 특유의 혈연의식이 깊게 깔려 있다는 얘기다.

물론 이 혈연과 함께 깊게 연루되어 있는 것이 신분상승이다. '마이 프린세스' 같은 드라마는 공주병을 가진 이설(김태희)이 사실은 조선 마지막 공주였다는 게 밝혀지고 궁으로 들어와 공주가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다. '폭풍의 연인'에서 별녀(최은서)는 우도에서 자라난 장애까지 가진 여자로 서울 부잣집에 얹혀사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사실은 굴지의 재벌기업 회장인 유대권(정보석)의 숨겨진 딸로 밝혀지면서 하루아침이 삶이 바뀌어버린다. 혈연의식과 신분상승이 맞물리면서 생겨나는 강력한 욕망들은 드라마에 다양한 흥밋거리를 만들어낸다.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서 서로를 찾기 위해 갈망하는 시퀀스가 그 하나가 되고, 엇갈리는 운명 속에서 부모 자식이 만나지만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원수 관계에 서는 시퀀스가 그 하나다. 그러다가 서로를 알아보게 되고 만나는 지점에서 그 욕망은 폭발하게 되고, 그 후에 순식간에 바뀌어지는 운명을 확인하는 쾌감을 선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에 핵심적인 것은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알 수 없는 운명 속에 허우적대고 있지만, 그걸 시청자들은 내려다보고 있다는 그 '신적인 시선'이다. 저들은 모르지만, 나는 알고 있는 운명. 이 시점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마치 운명을 자신의 손안에 쥔 듯한 권력을 부여한다. '출생의 비밀' 코드에 유독 시청자들이 열광하면서도 비난이 끊이지 않는 건 이 '쥐고 있는 듯한 권력'이 사실은 작가에 의해 휘둘리면서 어떤 채워지지 않는 갈증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흔히들 말하는 막장드라마가 자주 쓰는 '출생의 비밀' 코드는 따라서 시청자들이 열망하는 운명조종자로서의 권력과 늘 거리를 만들어 애태우게 하는 작가의 노림수인 경우가 많다.

사실 스토리텔링의 역사를 통해 보면 '출생의 비밀'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근원적인 욕망이다. 유리왕이 아버지 동명성왕을 찾아가는 이야기, 성서에 무수히 등장하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이야기는 이 스토리의 원형이 우리 유전자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각인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작금의 우후죽순 생겨나는 '출생의 비밀' 코드들은 이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여기에는 현재의 현실과 맞물리는 사회적인 맥락이 읽혀진다. 즉 가족 같은 혈연에 대한 집착, 마치 로또처럼 출생 하나로 인생을 역전시키겠다는 욕망, 그만큼 출구가 보이지 않는 현실. 이런 것들이 그 속에서는 꿈틀거린다.

한때 유행처럼 불었던 성장드라마들이 최근 들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도 늘어난 '출생의 비밀' 코드와 연관되어 주목될만한 현상이다. '대장금'이나 '선덕여왕' 같은 사극, 특히 여성사극이 인기를 끌었던 것은 그 인물의 성장드라마가 대중들을 열광시켰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이 이미 제목에서부터 덕만이 여왕이 될 거라는 걸 암시하는 것처럼, 이들 드라마는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성장의 과정에 집중한다. 어떤 고난과 역경을 딛고 성장했는가를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 코드는 다르다. 과정이 아니라, 아예 태생적으로 결과가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 평범하게 살아가던 한 인물은 마치 기연처럼 자신이 본래는 이렇게 비천한 인물이 아닌 비범한 출생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하루아침에 삶이 바뀐다.

물론 출생이 뒤바뀌어도 개인적인 노력으로 그 운명을 바꾸는 인물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개인적인 성공을 구가하던 인물들에게도 결국 출생의 비밀은 하나의 선물처럼 여겨지게 된다는 점이다. 네가 그렇게 고생했으니 응당히 받아야 될 선물이라는 판타지를 주는 셈이다.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싶은 현대인들의 변신욕구는, 현재의 삶을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라 가장 손쉽게도 과거의 출생을 바꿈으로써 이루려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 바로 꽉 막힌 현실이 좌절시키는 현대인들의 성장이다. 얼마나 팍팍한 삶이면 그 삶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출생마저 바꾸고 싶어 하겠는가.

출생에 목매는 드라마들이 양산되는 것은 물론 시청률을 염두에 둔 얄팍한 상술이다. 하지만 이 상술에 과거나 지금이나 시청률이 담보되는 현상은 변하지 않는 사회 현실에서 찾아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신화들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이 출생의 비밀을 건드린다고 해서 그것을 그저 인간의 본능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왜 바꿀 수 있는 현실을 바꾸려 하지 않고 바꿀 수 없는 것(출생)을 바꾸려 하는 걸까.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전해 내려오는 스토리들은 어찌 보면 우리를 지속적으로 그렇게 살아가라며 교육시켜온 사회 시스템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스토리가 머금고 있는 메시지들, 그것들의 싸움이 그저 스토리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변화까지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작금의 '출생의 비밀' 코드 속에 숨겨진 지배 시스템의 비밀을 바라봐야 될 시점이다. (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