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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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싸인', 정의가 밥 먹여 줘? 그렇다!

D.H.Jung 2011. 2. 5.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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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 능력만 좋으면 뭐해? 마음이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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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인'(사진출처:SBS)

회사로 치면 기술력, 개인으로 치면 능력이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던 시대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럴까. 능력 있는 그가 자신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는 것이 과연 그에게 이익으로 돌아갈까. '정의'는 이익과 상관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제동장치가 고장 난 기차가, 아무 것도 모르고 철로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 네 명을 향해 돌진한다. 당신은 지금 기차의 노선을 바꿀 수 있는 레버를 손에 쥐고 있다. 그 다른 노선 위에는 한 인부가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네 명을 살리기 위해 한 명을 희생시킬 것인가."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는 '정의'라는 주제의 강의를 이런 예시로 시작한다. 강의실을 가득 메운 학생들 중 대부분이 레버를 당기겠다는데 손을 든다. 그러자 샌델 교수는 되묻는다. "그게 과연 정의로운 일일까. 네 명의 생명만큼 그 한 명의 생명도 소중한 것이 아닐까." 이 첫 강의는 우리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문구로 기억하고 있는 벤담의 공리주의가 가진 허점을 꼬집는다. 강의를 듣다보면 처음엔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전혀 당연시할 일이 아닌 '정의'라는 선택과 판단의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된다. 즉 '정의'라고 하면 어딘지 거대한 일일 것만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매일 매일 숨 쉬고 선택하며 살아가는 일 자체가 '정의'와 연관된 것이라는 걸 샌델 교수는 깨우쳐준다.

작년에 분 이른바 '정의 신드롬'은 샌델 교수의 영향이 컸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정의'라는 단어에 대한 우리네 대중들의 갈증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정의 실종 시대. TV만 켜면 쏟아져 나오는 각종 권력형 비리들. 다수의 행복이라는 지상과제로 당연하다는 듯 짓밟히는 소수들. 멀리 볼 것도 없이 조직생활 속에서도 이익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가는 '정의'의 편린들을 우리는 거의 매일 보고 있지 않은가. 다만 그 추상명사를 조금 먼 나라 얘기처럼 치부하고 있을 뿐이다. 샌델 교수가 환기하는 것처럼. 그래서 권선징악이라는 다소 식상한 주제들이 과거는 물론이고 지금도 문화 콘텐츠 속에서 맹위를 떨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드라마 '싸인'은 그 극단에 서 있다. 이 드라마에서는 산 자들이 거짓말을 하고 죽은 자는 진실을 말하니까.

과학기술만으로 과연 충분한가
'싸인'을 보면서 과거 우연한 기회로 만난 국내에서 꽤 권위 있는 법의학자를 떠올렸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체를 통해 사인을 밝혀내는 일은 오히려 쉬워. 진짜 어려운 건 도덕적인 문제야." 그 말은 과거 꽤 빈번하게 벌어졌던 의문사 사건들을 떠올리게 했다. 권력과 민감하게 연결된 그 사안들 앞에서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싸인'의 대결구도를 이루는 윤지훈(박신양)과 이명한(전광렬)은 이 갈등의 두 축처럼 보인다. 학교 분교를 재건축한 듯 보이는 초라한 남부지원의 윤지훈과, 'CSI'를 방불케 하는 화려한 장비와 시설로 무장한 이명한의 부검실은 확실한 대비를 만든다. 몇 백 억을 들여 만든 장비로 사체를 부검하고 사인을 분석하는 이명한은 과학수사의 대명사처럼 보인다. 그런데 과학수사만으로 과연 충분할까. 몇 백 억 투자를 정부로부터 받아내기 위해 혹 사체 부검을 쇼처럼 하고 있지는 않은가. '싸인'은 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UV조명장치가 없어 노래방 조명을 떼다가 사인을 분석하는 윤지훈은 과학수사보다 더 중요한 것이 '도덕적인 문제'라는 저 법의학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다.

인권의 사각지대처럼 여겨져 온 강압수사가 횡행하던 시절, '과학수사'는 모든 걸 투명하게 해줄 것처럼 여겨져 왔지만, 과연 과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었을까. 문제는 과학이 아니라 법의학의 기본정신인 인권을 다루는 법의학자들의 도덕성이다. 그래서 '싸인'은 'CSI'처럼 쿨해 보이지 않는다. 보험금을 받기 위해 한 가장이 저지른 자살을 '과학적으로' 규명해내는 것보다, 그 가장이 왜 그런 자살까지 시도하면서 가족들을 챙기려 했는지에 더 주목한다. 즉 과학수사만으로는(물론 과학수사는 중요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도덕적인 정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얘기다.

여전히 기술력과 능력? 심성!
혹자들은 '정의'가, '도덕'이 밥 먹여 주냐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옛날 얘기다. 과거 노동집약적인 산업에 몰두하던 시절, 기술력은 한 회사의 사활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개개인이 가진 능력은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되는 덕목이었다. 물론 바로 이 능력이 모여 극대화될 이익이 회사의 목적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물론 이익은 회사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익 창출만을 위한 능력집단으로서의 회사는 미래가 없다. 회사는 이제 소비자들과 비전을 공유해야 하는 시대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상품의 사용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상품이 가진 비전의 공유가 되었다. 우리는 상품을 통해 환경을 나누고, 나눔을 나누고, 보다 나은 미래를 나눈다. 따라서 중요해지는 것은 회사의 기술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회사가 가진 심성(?)이다. 그 회사는 어떤 회사인가. 도덕적인가. 미래 가치가 있는가. 이런 점들은 이제 소비자들의 중요한 선택기준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게 어디 회사만의 문제인가. 그 회사를 구성하는 개인들도 회사와 가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제 개인의 능력만큼 중요해진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도덕적 판단능력이다. 심지어 한 사람의 잘못된 부도덕이 한 회사를 위험하게 만드는 상황을 우리는 종종 보고 있지 않은가. 도덕이니 정의니 하는 것은 우리가 고리타분하게 치부할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자기성장은 물론이고 회사 같은 조직의 성장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가치로 다가오고 있다.
(이 글은 현대 모비스 사보에 연재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