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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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스토리스토리

존재감이여! 미치도록 보여주고픈

D.H.Jung 2011. 4. 14.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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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너 거기 있었니?" 어린 시절 이런 얘길 참 많이도 들었다.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말수도 없는데다가 막상 입을 열어도 그다지 빵빵 터트리지 못했던 나는 말 그대로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심지어 말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아서, 무슨 얘길 꺼낼 때마다 이걸 말해 말어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시골 아이가 떡 하니 서울 한 복판으로 전학을 왔으니 이건 투명인간이 따로 없었다.

 

그 때 나는 대신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었는데, 어디 바깥에 나가면 늘 뭔가를 주워오는 것이었다. 누나는 그런 내가 신통했던지 "어디 바닥에 그런 게 다 있어?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던데...", 하곤 했다. 그렇게 내가 주워오는, 누군가 버린 물건들은 하나하나 모여서 내 책상의 한 구석을 장식하곤 했다. 존재감 없는 아이는 그 누군가 버린 물건들을 갖고 책상에 앉아 혼자 놀이를 했다. 팔 한쪽이 떨어진 울트라맨이 주인공이고 꼬리가 잘린 공룡이 악역이며, 문짝 하나가 빠진 장난감 자동차가 울트라맨이 공룡을 이기고 구해야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친구 없이도 그렇게 혼자 몇 시간을 놀 수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내 친구였으니까.

'추노'(사진출처:KBS)

'추노'의 성동일에게 '미친 존재감'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대중들이 붙여줄 때, 내가 절절히 공감한 것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 존재감 없던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게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어쩌면 그저 주변인물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그가, 말 그대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연기를 보여줄 때, 나는 정말 가슴 한 구석이 울컥할 정도로 짜릿함을 느꼈다. 물론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니었을 게다. 수많은 이들이 그 미친 존재감에 열광하고 있었고, 얼굴만 슬쩍 보여준 티벳 궁녀 최나경이니, 어눌한 목소리로 오히려 주목받은 송새벽 같은 인물이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사실 주연이니 조연이니 하는 것은 작품의 제작자들이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미친 존재감은 다르다. 그것은 바로 대중들이 수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호칭에는 대중들이 가진 존재감에 대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나도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미치도록!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면 나는 '미칠'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어느 정도 존재감을 갖고 있는 편이다(착각인가?). 그 옛날 존재감 없던 아이가 지금 이렇게 글줄이라도 써가며 살아가고 있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참 기적 같은 게 있어서 그 때의 상황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 때 어디선가 자꾸만 물건들을 주워왔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버려졌을 그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그 아이가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아이가 그 버려진 물건들을 갖고 만들어내는 스토리에는 늘 '미친 존재감'이 있었다. 울트라맨은 어디선가 팔 한 짝을 잃어버렸지만 늘 마지막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친 존재였으니까. 그때 막연히 했던 그 스토리 훈련(?)이 어쩌면 지금 늘 스토리를 쓰며 사는 나를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늘 주워오던 그 아이는 그 순간부터 '미친 존재감'을 꿈꾸고 실현시키려 했는지도.
(이 글은 사보 '모터스 라인'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