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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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이 드라마가 유혹적인 이유

D.H.Jung 2011. 8. 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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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의 향기’, 이 로맨틱 코미디가 보여주는 진지함

'여인의 향기'(사진출처:SBS)

알파치노가 주연한 ‘여인의 향기’는 우리에게 탱고로 기억된다. 장님이 된 퇴역장교 슬레이드(알파치노)가 어느 식당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인과 추는 탱고. 그 장면이 좀체 잊히지 않는 것은 그 속에 꽤 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슬레이드는 절망감 속에 자살여행을 떠난 것이었고, 그래서 죽기 전 해볼 수 없던 것들을 해보며 마지막 삶의 불꽃을 태우는 중이었던 것. 그래서 그 춤은 절망감 속에서 오히려 더 활활 타오르는 삶의 의지처럼 보였다. 보이지 않아도 선율을 따라 움직이는 몸처럼.

김선아의 복귀작, ‘여인의 향기’는 여러모로 알파치노의 ‘여인의 향기’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여행사 말단직원으로 지내다 어느 날 암 선고를 받는 이연재(김선아)는 뭔가 죽기 전에 못해본 것들을 해보려고 한다. 한 번도 타보지 못한 1등석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로 여행을 떠나고, 거기서 우연히 그녀가 일했던 라인투어 본부장인 강지욱(이동욱)을 만난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데렐라의 구조를 따르고 있고, 여기에 김선아표 로맨틱 코미디가 덧붙여져 있지만, 흥미로운 건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은 이 가볍기 그지없는 로맨틱 코미디에 삶에 대한 어떤 진지한 태도를 부여한다.

시한부 인생이라는 설정은 상투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를 통해 던지는 삶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꽤 진지하다. 연재에게 암 선고를 내리는 종양내과 의사 채은석(엄기준)이 보여주는 죽음에 대한 비정한 태도는 의미심장하다. 다가오는 죽음을 알고 현재의 삶을 더 가치 있게 보내려는 연재와 달리, 은석은 죽는다는 그 사실에만 집착한다. 즉 어떤 조치를 취한다고 해도 죽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항암제가 필요 없는 환자에게 ‘죽음을 준비시키라’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환자는 그날 밤 죽음을 맞는다. 은석의 말 한 마디에 희망의 끈을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거창할 것 없이 이 드라마는 우리가 인생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시한부 인생은 사실 짧게 본 우리 삶이 아닌가. 그러니 어차피 죽음으로 돌아가게 될 우리들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이 드라마의 주제다. 흥미로운 것은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하면서 연재의 삶이 달라지고, 그녀로 인해 주변인물들 즉 지욱이나 은석의 삶도 달라진다는 점이다. 라인투어의 본부장인 지욱은 재벌2세로 삶 자체를 권태롭게 여기는 인물. 그에게 5백만 원짜리 요트투어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지만 이 요트에 연재가 함께 타자 이야기는 달라진다. 연재는 말한다. “직접 겪어보고 체험해봐야 좋고 나쁜 것을 알 수 있다”고.

은석은 연재를 만나 어딘지 자신의 의사로서의 생활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간다.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여겼던 환자들이 연재라는 인물에 의해 차츰 그들 모두 자신과 관계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결국 연재의 죽어가는 삶이 은석과 지욱에게 삶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신데렐라 스토리 구조는 역전된다. 은석과 지욱이 연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연재가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다.

‘여인의 향기’는 저 알파치노의 작품이 말하는 것처럼 삶에 대한 의지를 표상한다. 눈이 멀어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또 곧 죽음이 임박해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해도, 그 강렬한 향기는 삶의 향기처럼 여전히 유혹적이다. 그 유혹적이고 치명적인 향기를 로맨틱 코미디라는 대중적인 장르로 유쾌하게 포장한 이 드라마는 그래서 우리에게 손을 내민다. 쉘 위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