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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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도대체 이 원숭이들의 힘은 뭘까

D.H.Jung 2011. 8. 30.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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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원숭이의 시점으로 바라보니

'혹성탈출'

원숭이들이 지배하는 세상? 1968년에 나왔던 '혹성탈출'을 TV로 보며 자란 세대라면 '혹성탈출'이라는 제목에서 먼저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지도 모른다. 무너진 자유의 여신상으로 집약되는 그 옛 영화에서 우리는 원숭이들에 의해 우리에 가두어진 인간들을 충격적으로 바라봤었으니까. 하지만 2011년 '진화의 시작'이라는 부제를 달고 돌아온 '혹성탈출'은 '진화'라는 그 키워드에 더 집중한다.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가의 얘기가 아니라 진화는 어떻게 일어나고 그 결과는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가를 이 영화는 영화적 상상력으로 흥미롭게 풀어낸다.

애초부터 시저라는 챔팬지가 자신이 떼어낸 목줄을 인간의 목에 걸 의도는 없어 보인다. 결국 갇혀있던 우리를 빠져나와 세상을 일대 혼돈으로 몰아넣는 그 장면들 속에서도 그는 인간을 죽이려는 다른 유인원들에게 "안돼!"하고 소리친다. 즉 시저와 유인원들의 반란(?)은 복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인간들의 욕망에 의해 우리에 갇힌 시저와 유인원들은 자신들의 집(정글,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것뿐이다.

흥미롭게도 원숭이가 인간을 압도하며 이 지구라는 생태계에 새로운 최강자로 서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진화에 의한 자연선택의 결과다. 인간은 과학의 이름으로 생태계를 교란시켰고, 그래서 환경이 바뀌었으며, 다만 그 바뀐 환경에서 인간보다 원숭이들이 더 잘 적응해낸 것뿐이다. 즉 인간의 추락은 인간 스스로 판도라 상자를 열어버림으로 해서 생겨난 진화의 결과라는 얘기다.

'인간보다 나은 원숭이와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풍자는 어딘지 고전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힘을 발휘한다. 영화가 시작하면서 원숭이 사냥을 벌이는 인간을 먼저 보여주고 그렇게 잡힌 원숭이의 눈 속으로 카메라가 들어가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이것은 인간의 시점이 아니라 원숭이의 시점으로 이 영화가 흘러간다는 복선이다. 그래서 한참 영화를 보다보면 인간이 아닌 원숭이의 편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이 영화를 즐기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인간은 똑똑한 원숭이들을 싫어해.' 우리에 갇힌 시저에게 누군가 건네는 이 말은 우리가 원숭이 같은 유인원을 바라보는 양가적 감정을 잘 드러낸다. 우리는 우리와 비슷한 유인원을 보며 친근감을 느끼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들이 지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우면서도 그들이 어쩌면 우리와 같은 뿌리라는 것에 불쾌감을 느낀다. '혹성탈출'은 이 친근하면서 놀랍지만 섬뜩하고 두려운 유인원이라는 존재에서 시작해 차츰 그 내면으로 들어간다. 두려움 때문에 자연을 수정하고 인공적으로 만들려는 인간의 욕망은 원숭이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력이다.

그래서 시저의 눈으로 그 폭력적인 인간을 바라보다가 결국 우리를 빠져나와 유리창을 깨고 자동차를 막아 세우며 도시를 질주하는 유인원들의 광경은 놀랄만한 스펙터클의 쾌감을 안겨준다. 만일 이것이 테러리스트들과 대결을 벌이는 형사물이라면 이러한 파괴는 불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연으로 돌아가려는 유인원들이 인공을 마구 헤치고 달리는 장면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우리에게 안긴다.

결국 2011년에 다시 돌아온 '혹성탈출'의 힘은 바로 이 시점의 이동에서 생겨난다. 우리는 시저라는, 지능이 인간보다 뛰어난 침팬지의 가면을 쓰고 도시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자 도시가 가진 그 답답함과 저들의 욕망을 토대로 축조된 세상의 부조리함이 보이게 된다. 병을 정복한다는 명분으로 유전자를 마구 조작하고, 인공적인 도시의 안락함 속에 자연조차 우리에 가둬 전시하는 인간의 욕망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1968년에 만들어진 '혹성탈출'의 그 '혹성'이 지구를 제 3자화해 그곳을 '탈출하고픈 어떤 곳'으로 그려낸 것처럼, 2011년 '혹성탈출'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시저의 눈으로 바라본 탈출하고픈 도시가 지구로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