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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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인', '천일'보다 더 슬픈 이유

D.H.Jung 2011. 12. 22.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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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일'의 긍정론, '브레인'의 부정론

'브레인'(사진출처:KBS)

공교롭게도 월화극 두 편이 모두 뇌 질환을 다뤘다. 종영한 '천일의 약속'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서연(수애)과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지형(김래원), 그리고 그녀를 이해하고 같이 아파하는 주변인물들을 통한 인간애를 다뤘다. 반면 '브레인'은 어린 시절 뇌수술을 받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뇌수술 전문의가 된 이강훈(신하균)이 역시 뇌종양에 걸린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그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과정을 다뤘다.

두 사람 다 죽음을 맞이하거나 목도해야 했지만, 바로 그 죽음을 다루면서 보여주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사뭇 다르다. '천일의 약속'이 서연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그래도 인간적인 세상은 살만하다'는 것이고, '브레인'이 죽은 어머니 앞에 오열하는 이강훈을 통해 보여주는 건 '현실은 그렇게 만만한 판타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서연은 점점 기억이 사라져가고 결국에는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그 참혹한 상황을 겪지만 이것을 '새드 엔딩'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 드라마는 결국 죽음이 아니라 기억의 문제를 다룬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지형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는 서연은 비극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진짜 현실이라면 어땠을까. 물론 '천일의 약속'이 제시한 서연의 삶이 전혀 현실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토록 담담하고, 예의 있는 주변인물들의 모습들은 분명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다는 걸 부인하긴 어려울 것이다. 즉 '천일의 약속'은 비극적인 사랑을 다루지만 그것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브레인'은 다르다. 이 도무지 웃음이라는 걸 잊어버린 듯 잔뜩 찡그리거나 무표정한 얼굴로 살아가는 이강훈은 지독한 현실을 아무런 판타지 없이 드러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연구한 치료제로 어머니가 살아나는 '기적' 같은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았다. 만일 의사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더 담담했을 수 있었겠지만, 스스로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었기에 어머니의 죽음을 바라봐야 하는 무력감은 더 컸을 것이다. 그는 심지어 아버지의 죽음과 연루되어 있다 여겨지는 김상철(정진영) 교수 앞에 무릎을 꿇고 "어머니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인물이 아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 "수술해 달라"고 애원하며 한 번도 드러내지 않았던 이강훈의 아픔이 드러나는 장면이 더 슬픈 건 그 때문이다.

'천일의 약속'이 죽음 속에서도 남긴 긍정적인 미소보다, '브레인'의 이 처절한 눈물이 더 슬프고 공감되는 건 아마도 작금의 현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디 지금 우리가 밟고 사는 세상이 긍정적인 미소로 바뀌어질 수 있는 세상인가. 그런 긍정론마저 사치로 여겨지는 세상이 아닌가. 그래서 '브레인'의 이 처절할 정도로 무너지고 부서지는 이강훈이란 캐릭터에 우리의 마음이 빼앗기는 것을 게다. 그의 독기 오른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그렇게 만든 이 지독한 세상을 읽어내는 것이니까.

'천일의 약속'보다 '브레인'이 더 공감되고 더 슬프게 여겨지는 건 바로 이 현실에 대한 인식의 차이 때문이다. 한 사람이 기억을 통째로 잃어가는 치매와 그것을 주변사람들이 이해하고 희생해주는 삶의 이야기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지만,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뛰어다니는 아들에게 "그냥 가게 내버려 둬"라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한 가난한 어머니가 주는 생생한 현실의 느낌은 느끼기 어렵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과연 그렇게 아름다운 것인가. '브레인'은 이강훈을 통해 그걸 질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