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개그콘서트', 생물 같은 경쟁력의 비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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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콘서트', 생물 같은 경쟁력의 비밀

D.H.Jung 2012. 1. 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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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 프로그램, '개콘' 경쟁력 분석

'개그콘서트'(사진출처:KBS)

무대개그의 시작은 '개그콘서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간 개그의 양대산맥으로 내려오던 '유머일번지'류의 콩트 코미디와 '일요일 일요일 밤에'류의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안전함'의 틀을 깼다. 그 '안전함'이란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경쟁이 없다는 것과 일방향성 프로그램이라는 것. 무대개그는 개그맨들의 무한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관객과 개그맨이 호흡하는 개그의 쌍방향 시대를 예고했다. 개그는 더 이상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짜진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개그맨들은 편집되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아이디어를 짜내야 했고 무대에 올려진 후 관객에게 외면 받으면 여지없이 통편집되는 '정글'을 경험하게 됐다. 물론 개그맨들에게는 힘겨운 현실이었지만, 이 시스템은 프로그램에는 엄청난 자양분이 되었다. '개그콘서트'는 끊임없이 다양한 캐릭터와 유행어와 인기 코너들 그리고 화제를 만들어냈다.

경쟁은 경쟁을 불러왔다. 개그맨의 경쟁이 '개그콘서트'라는 무대 위에서 벌어졌다면, 이후의 경쟁은 각 방송사들에 의해 벌어졌다. '웃찾사', '개그야' 같은 무대개그가 방송사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개그의 춘추전국시대가 도래하는 듯 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렇게 급조된 형태의 무대개그가 개그 코너들을 만들어낼 수는 있었어도 '개그콘서트'처럼 탄탄한 시스템을 갖추지는 못했다는 점이다. 선배들이 끌어주고 후배들이 받쳐주는 '개그콘서트' 특유의 시스템은 경쟁 속에서도 상생하는 힘을 발휘했다. 반면 타 방송사의 무대개그들은 한층 더 심해진 경쟁 속에서 차츰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내며 사라져갔다. 그리고 처음처럼 오롯이 '개그콘서트'만이 살아남아 무대개그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개그콘서트'류의 짧은 개그들이 갑자기 주목을 얻은 데는 시대적인 이유도 있다. 그 첫 번째는 시대가 요청하는 서사구조의 변화다. 사실 리모콘이 생겨난 이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혹은 '서론-본론-결론' 형태로 이어지는 서사구조는 끊임없이 공격받아왔다. 이제 시청자들은 발단에서부터 뜸을 들이는 것을 기다리지 못한다. 시작이 지루하면 프로그램은 시청자의 손가락에 의해 여지없이 잘려져 나간다. 그러니 전통적인 서사구조에서 발단-전개나 서론은 점점 축약되고 있다. 그것은 이제 드라마건 방송 프로그램이건 김수현 작가 식으로 표현하면 "베토벤의 '운명'처럼 처음부터 짜자자잔 하고" 시작한다. 사실, 너무나 서사구조에 익숙해져버린 시청자들 입장에서 보면 서론은 너무 뻔한 것이다. 우리는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고 '척'하고 보여주면 '착'하고 알아듣는 시대에 살고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잘 맞아떨어지는 프로그램이 바로 '개그콘서트'류의 무대개그다. 많은 개그맨들을 무대 위에 올려놓고 짧은 시간을 주고는 웃기지 못하면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이 쿨한 시스템에서 서론은 설 자리가 없다. 1차로 PD가 가위질을 하고, 그렇게 살아남는다 해도 2차로 시청자들이 리모콘으로 가위질을 하는 상황에서 개그는 좀 더 콤팩트하고 군더더기 없는 형태로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개그콘서트'는 이 대중들이 선호하는 서사구조가 달라지는 시점에 징후처럼 등장한 짧은 개그를 뽑아내는 시스템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논리적이고 순차적인 서사에 대한 거부(?)는 상당부분 디지털 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아날로그 문화가 가진 '처음부터 중간 과정을 다 봐야 끝을 볼 수 있는' 서사의 특성은 디지털 문화로 오면서 '아무 곳에서나 중간 중간 끼어들어 볼 수 있는' 하이퍼텍스트적인 속성으로 바뀐다. 이것은 성향이 기술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술이 성향을 낳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 프로그램으로 적용되어 '개그 콘서트'처럼 분절적인 구조의 개그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물론 이런 시대적인 요청에 맞는 형식의 변화만으로 '개그콘서트'가 장수할 수 있었던 건 아니다.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그 형식을 어떤 방식으로 채워왔는가, 즉 내용의 문제다. '개그콘서트'가 '개그야'나 '웃찾사'에 비해 더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던 건 개그가 개그에만 매몰되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조우해왔다는 데 있다. 물론 '개그야'나 '웃찾사' 역시 현실과 무관한 소재들을 다뤘던 건 아니다. 하지만 '개그콘서트'에 비교해보면 그 현실공감에 있어서 현저하게 뒤쳐진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개그야'나 '웃찾사'가 보여준 주로 말장난에 의존하는 면과 의미 없는 슬랩스틱의 반복은 당장 웃음을 뽑아낼 수는 있지만 시청자들에게 여운을 남기기는 어렵다. 그런 면에서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현실이라는 무한정 넓은 소재의 텃밭을 잊지 않고 돌아봤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대중들의 욕구를 바라봤다는데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감'할 수 있는 개그를 지향했다는 것이 그 경쟁력의 핵심이 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 텃밭을 갖고 있는 '개그콘서트'의 코너들은 당대의 사회적인 분위기에 따라 개그코너들도 성격을 달리해왔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거꾸로 얘기하면 '개그콘서트'를 통해 사회의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개그콘서트'의 초창기 코너들을 보면 이른바 '자학개그'들이 주류를 이뤘다. 슬랩스틱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는 '자학개그'들은 바닥에 떨어진 걸 주워 먹거나, 이빨로 무를 갈거나, 못생긴 얼굴을 과장되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심지어 '마빡이'같은 코너는 특별한 내용 없이 끊임없이 자신의 이마를 때리는 것으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 자학개그들은 그러나 단순한 몸 개그에 머무는 건 아니었다. 그 자체로 힘겨운 현실을, 자학함으로써 살아가는 개그맨이라는 직업을 통해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자학을 포함한 단순한 몸 개그들은 꽤 오래도록 지속되었다. 이것은 IMF로 허덕이던 현실이 많이 반영된 것들이다. '개그콘서트'는 다름 아닌 바로 그 IMF로 힘겹던 1999년의 현실을 갖고 시작됐다는 것이다. 무한 경쟁해야 살아남는 개그맨들의 현실 또한 이런 경쟁적인 사회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몸 개그 역시 단순하고 자극적인 형태에서 머물렀던 건 아니다. 심하면 한두 주에도 사라져버리는 이 칼날 같은 무대 위에서 무려 4년 간이나 버텨낸 김병만의 '달인'은 진화해온 몸 개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코너다. 이 코너는 초기에 달인도 아니면서 달인이라고 우겨대는 개그맨 김병만의 뻔뻔한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김병만은 놀랍게도 실제 달인의 면모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실제로 줄타기를 하고, 물구나무를 선 채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등의 기예를 진짜 선보이자, 관객들은 가짜 달인에서 진짜 달인으로 변한 김병만의 반전에 매료되었다. '달인'의 사례가 보여주듯 개그의 생명력은 그것이 몸 개그든 말 개그든 역시 틀에 박히지 않고 끝없이 변화하고 진화하는 그 과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슬랩스틱류의 몸 개그들은 최근 들어 그 경향이 바뀌었다. 즉 '개그(gag)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말 개그가 중심이 되면서 주고받는 대화를 통한 웃음이 주류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화, 즉 이야기가 개그의 중심이 되면서 그 소재는 훨씬 더 현실적인 것들이 되었다. 즉 현실에서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개그의 소재가 되었던 것. '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 이른바 '애정남'은 이 달라진 트렌드를 대표하는 개그다. 함께 음식을 먹다가 마지막 하나가 남았을 때 누가 그것을 먹을 것인가, 혹은 지하철에서 할머니와 임산부가 동시에 탔을 때 누구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인가 같은 너무나 일상적이어서 문제 자체가 되지 않을 상황에 대해 '애정남'은 친절하게도 답을 지정해준다. 물론 그 답은 대단한 게 아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건 돈 내는 사람이 먹는다"는 식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 대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애정남'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이제 뭔가 살다가 부딪치는 애매한 상황만 만나면 '애정남'을 들먹이게 된 것이다. '애정남'의 인기는 몸 개그가 주던 처절함보다는 이제 말 개그를 통한 공감대에 대중들이 더 열광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거꾸로 보면 한국의 대중들이 소통에 대한 갈망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하고 맞장구를 쳐줄 때 갖게 되는 그 공감대 속에서 대중들은 그들만의 내밀한 소통의 즐거움을 느꼈다.

현실에 대한 공감이 말 개그의 주류로 떠오르면서 살아난 것이 바로 풍자 개그다. '개그콘서트'는 그 어느 때보다 강하고 직설적인 정치, 시사 풍자를 선보였다. 과거라면 아예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을 국회의원을 소재로 하는 정치 풍자가 등장했고, 이제는 대통령에서부터 관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소재의 폭이 넓어졌다. '사마귀 유치원'과 '비상대책위원회'는 그 대표적인 코너다. '사마귀 유치원'은 유치원 선생님의 목소리로 어른들의 세계를 낱낱이 풍자하는 코너이고, '비상대책위원회'는 비상상황을 설정해 놓고 그 상황 속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안되는 이유를 줄줄이 늘어놓는 관료주의를 꼬집는 코너다.

흥미로운 건 이러한 과감한 풍자가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과거처럼 모종의 정치적 외압 같은 것이 그다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정치가 문화를 억압하던 구시대와는 분명 달라진 현실이다. 즉 문화란 가려지고 억눌려진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감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점을 정치권에서도 인식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제 우리 현실에서 정치는 어쩌면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공생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개그콘서트'가 보여주는 풍자개그와 공감개그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대는 이제 제아무리 정치권이라도 손댈 수 없는 영역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이렇게 되자 그동안 상대적으로 다뤄지지 않았던 정치나 시사 분야의 소재들은 이제 오히려 개그의 블루오션이 되어가고 있다. '개그콘서트'는 어쩌면 그 지대를 먼저 찾아서 열어젖힌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그콘서트'의 장수비결은 위에서 열거한대로, 그 시대에 조응하는 형식과 시스템의 구축과 그 안에 현실과 공감하는 내용을 끊임없이 채워 넣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즉 디지털 시대가 갖고 온 좀 더 분절적이고 빠른 서사에 대한 욕구를 '개그콘서트'는 일찌감치 읽고 있었으며,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보다 경쟁력 있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그리고 이 시스템 안에서 당대의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만들어나갔다. 현실은 따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개그콘서트'와 상호작용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나온 코너들은 대중들에게 회자되며 인기를 끌 수 있었다. 결국 한 마디로 말하면 '개그콘서트'의 생명력은 하나의 형식과 내용으로 굳어진 박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달라진 현실과 함께 변화해온 생물 같은 진화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개그가 현실과 유리되지 않는 한, 지금도 진행형이고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글은 <신문과 방송>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