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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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진 화살', 작품일까 상품일까

D.H.Jung 2012. 1. 29.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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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마케팅, '불편한 진실'도 팝니다

사진=부러진 화살

요즘 영화관에 가면 영화 보기 전에 10분에서 심지어 20분 가까이 광고를 봐야한다. 작년 사회적인 공분을 불러일으킨 '도가니'나 올해 또 제2의 '도가니' 현상을 예고한다는 '부러진 화살' 같은 어딘지 광고와는 어울리지 않는 작품도 여지없이 광고를 봐야 볼 수 있다. '작품'과 '상품'은 언제부턴가 이렇게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부러진 화살'을 보기 전에 흘러나온 휴대폰 광고 중 개그맨 황현희가 하는 광고는 이 작품과 상품의 친밀한 관계를 잘 보여준다. 최신 LTE폰을 소개하는 이 광고는 황현희가 '개그콘서트'에서 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을 패러디한다. 황현희가 LTE폰을 놓고 "과연 품질은 어디 있다는 걸까요?"하고 묻고 "모든 시에서 다 되지 않는 LTE가 되는 것처럼 얘기하는 이 불편한 진실"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광고하는 LTE폰만이 전국 모든 시에서 터지는 유일한 LTE라는 얘기다.

황현희가 하고 있는 '불편한 진실'은 본래 르뽀 프로그램을 패러디한 개그. 무언가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그 진지한 형식은 그대로 개그의 소재로 패러디된다. 그리고 그 코너는 또 한 휴대폰 광고에 패러디된다. 원본인 르뽀 프로그램의 진지함은 몇 번의 복제 패러디를 반복하면서 원본과는 전혀 다른 상품으로 전화된다. 그것이 심지어 '불편한 진실' 같은 소재라도 말이다. 요즘 광고는 이처럼 주의를 끌 수 있는 것이면 뭐든 삼켜버리는 괴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러진 화살' 논란을 보면서 이것이 저 '불편한 진실'마저 흥행이 된다면 꿀꺽 삼켜버리는 괴물을 떠올리는 건 지나친 비약일까. 사실 이 영화를 둘러싼 김명호 교수의 주장과 사법부의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일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지만 이 글이 하려는 얘기와는 거리가 멀다. '부러진 화살'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이 그간 사법부에 쌓인 불신에 대한 공분이라는 정확한 분석 또한 이 글에서는 논외다. 더 중요한 건 그것이 불편한 진실이건 아니건 세상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이슈가 된다면 뭐든 삼키기 시작한 영화의 본격화된 이슈 마케팅이다.

'도가니'의 성공은 대중들이 갖고 있는 정서에 불을 지름으로써 그것이 상품 마케팅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이 '불편한 진실'은 어느 순간에는 '보는 것'이 인권이라는 놀라운 등식까지 만들어냈다. 이 말은 거꾸로 하면 '안보면 인권을 외면하는 행위'가 되는 것처럼 조장된다. 물론 많은 이들이 '도가니' 같은 작품을 통해 바뀌어진 현실에 박수를 친다. 실로 박수 받을 일이다. 영화가 현실을 바꿀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게 있을까. 하지만 동시에 그 뒤에서 작동하는 상품 마케팅 논리를 놓쳐서도 안 된다. '도가니'는 상품으로서도 작품으로서도 성공적인 작품이지만 이렇게 이슈로서 성공을 맛본 자본은 또 다른 이슈를 상품을 위해 만들어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상품 마케팅 논리는 때로는 필요하다면 없는 '불편한 진실'도 만들어내는 괴물이다.

물론 '부러진 화살'이 없는 '불편한 진실'을 만들어낸 작품이란 얘기는 아니다. 어쨌든 대중들이 생각하는 사법부란 영화에서 그려지듯이 어딘지 고압적이고 권력적이며 서민들의 이야기 따위는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것 같은 이미지로 자리해있기 때문이다. 그것뿐인가. 사법부 권력의 보이지 않는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거래들마저 있을 것이라는 음모론마저 대중들에게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정도다. 대중정서가 이럴진대, '부러진 화살'이 조금 편파적으로 사법부를 그렸다고 해서 거기에 뭐라 할 대중들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통쾌함을 느꼈을 지도. 즉 진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바로 이러한 대중정서에 자리한 사법부에 대한 그간의 이미지다. 영화가 '불편한 진실'을 상업화하는 부분은 바로 이러한 대중정서를 건드리는 지점에서 폭발력을 갖게 된다.

하지만 '부러진 화살'의 통쾌함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작동되고 있는 상품 마케팅의 놀라운 힘을 경험하는 것은 또한 씁쓸한 일이다. 장애 여성과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성폭행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내용의 법 제정을 이끌어낸 건 수많은 관련 사회단체가 아니라 영화 한 편의 힘에 의해서다. 지금 감히 사법부와 한 판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도 다름 아닌 영화 한 편의 힘이다. 그런데 이것은 과연 작품의 힘일까, 아니면 상품의 힘일까.

이슈가 넘쳐나는 세상, 거의 매일 새로운 이슈가 쏟아져 나오는 세상에서 이제는 뭐든 이슈화되지 않으면 대중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고 사장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제 '불편한 진실'을 통한 이슈화조차 또 하나의 상품 마케팅 방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만일 이것이 작품으로 승화되지 못하고 상품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면 문제는 심각해질 수 있다. 자칫 상품 논리에 의해 진실마저 사고파는 그런 세상이라면, '진실'은 사라지고 '불편함'만 가득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자. '부러진 화살'은 작품인가, 상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