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한류와 민족주의의 위험한 동거 본문

옛글들/영화로 세상보기

한류와 민족주의의 위험한 동거

D.H.Jung 2007. 2. 18. 17:07
728x90

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를 달아야 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한류라는 이름 하에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연예인으로 ‘우리나라 문화 알리기’보다는 ‘이웃나라와 친해지기’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제 과거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자체를 알리는 데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서를 통해 흥행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한일전’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비인기종목이라 하더라도 피끓는 감정으로 보던 스포츠경기의 흥행요소와 같다. 김진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이 공조해 일본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할 정도이다. 물론 과거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개봉했다 실패한 ‘한반도’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에만 기대서는 자국에서도 해외에서도(이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상품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한 해 TV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 사극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제작한 이들 드라마를 가지고 한류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반한류의 기류를 형성해 여타의 드라마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작년 한 해 우리가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달아 해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적은 수마저도 이런 기류 속에서 판매부진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류에 포함된 상품논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화상품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민족적 정서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진영씨가 스스로를 “애국자가 아닌 배신자”라 자칭하며 미국에서 음악을 만들 때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며 만든 “흑인음악 속에 한국은 없었다”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한류’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상품’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이다. 즉 ‘한류’에는 그 안에 상품논리가 들어가 있다. 박진영씨의 글은 바로 이 상품에 대한 이야기며, 그 상품이 세워야할 전략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고’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는 절대 해외마켓에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문화컨텐츠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국내의 시장만으로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굳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상품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만일 박진영씨의 글이 이런 해외를 겨냥한 문화상품전략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말 그대로의 ‘국적 없는 문화’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현재 거대자본과 세계적인 유통망과 힘을 가진 소위 선진대중문화의 세계화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싫더라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해외 시장을 노리는 상품의 하나로 한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류 속에 내포된 반한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 한류가 태동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한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러므로 ‘한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들어있으며 그 자체로 ‘반한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류가 세계적으로 흐르고 넘칠 때일수록 우리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품 마케팅으로서는 더 유리하다.

게다가 한류는 특정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문화종사자들이 열심히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다면 그 때부터 컨텐츠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장경제 논리와 마찬가지다. 잘 움직이는 시장에 국가가 손을 대면 경제는 어지러워진다. IMF에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한류라는 냉수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한류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을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들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잉된 한류’이다. 우리 스스로 한류 한류 외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조장된 결과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우리 입으로 한류를 들먹이지 말고 좀더 차분하게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류라는 막연한 태극마크에 기대 안이하게 제작했다 실패하는 사례도 줄어들 것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성에 승부한다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명성은 우리가 떠들고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타인의 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