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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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가 야한가, 슬프다

D.H.Jung 2012. 4. 28.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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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사멸해가는 존재에 대한 연민

 

"할아버지. 뾰족한 연필이 슬퍼요?" 열일곱 살 소녀 은교(김고은)가 칠순이 다된 국민시인 이적요(박해일)에게 묻는다. 이적요는 어린 시절 학교 갈 때 필통에서 달각거리던 연필 이야기를 통해 연필이라도 각자의 기억에 따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가진 이미지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은교가 "그게 시인가요?"하고 되묻는 것처럼 시란 그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라도 저마다의 의미로 새로워질 수 있는 가능성과 다름 아닌 것이다.

 

 

사진출처: 영화 <은교>

<은교>에 대한 홍보 마케팅 포인트가 이 영화가 가진 진면목과 이승과 저승만큼의 거리를 갖는다는 건 그래서 아이러니다. 마치 19금 영화로 치부되고, 나이든 할아버지가 어린 여고생을 탐하는 변태적이고 성적인 영화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선이 관객들을 영화로 끌어들이려는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것. 실제로 이 영화는 개봉 이전부터 성기나 음모 노출 같은 노출 수위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똑같은 벗은 몸이라도 그것을 성적인 노출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과, 하나의 나이 들어가는 육체로 바라보는 시선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멸해가는 몸에 대한 서글픈 인간의 조건을 다룬 <은교>에서 노출은 어쩌면 당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적요의 벗은 몸은 그 쓸쓸함을 담아내고, 은교의 벗은 몸은 청춘의 생기를 담아내며, 서지우(김무열)의 벗은 몸은 외로움과 욕망을 담아낸다.

 

산장처럼 깊숙한 숲속에 놓여진 이적요의 집은 이적요 자신처럼 고적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다. 그 속에 쌓여진 책들 속에 앉아있는 이적요의 모습은 마치 책들의 무덤에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책이란 유적처럼 남는 것이 아닌가. 그 이적요 자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그 집에 어느 날 느닷없이 은교가 들어온다. 은교는 그 낡은 마룻바닥을 청소하고 서재 곳곳에 놓여진 찻잔들을 치우고, 먼지가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는다.

 

사실 은교의 노출이나 섹스보다 더 가슴을 살랑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낡은 이적요의 공간에 풋풋한 은교가 들어온다는 그 사실일 것이다. 이적요는 차츰 낡아져가는 자신으로 인해 잊고 있었던 '청춘'의 설렘을 되찾는다.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은교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다.

 

이적요의 옆에 젊은 베스트셀러 작가인 서지우가 있다는 것은 이 사랑의 아이러니를 잘 대비시켜준다. 젊은 서지우와 은교가 서로의 몸을 탐하는 것은 '외로워서'이다. 젊은 그들은 육체의 욕망에 눈 멀어 사랑을 보지 못하고, 나이든 노구의 시인은 사랑을 느끼나 이미 늙어버렸다. 훗날 은교가 벽을 향해 등 돌리고 누워 있는 이적요에게 쏟아내는 그 눈물이 그토록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건 그 등 돌림 하나가 거대한 시간의 장벽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은교>는 벗은 몸의 에로티시즘보다 그 생기발랄한 몸이 주는 생명력과 사멸해가는 몸의 비통함이 더 느껴지는 영화다. 극 중에 서지우가 이적요에게 "이건 사랑이 아니라 추문"이라고 얘기했을 때, 이적요가 분노하는 건 마치 이 영화에 대한 오독을 경계하는 말처럼 들린다. 스캔들이 아니라 하나의 사랑이 분명한 <은교>는 그래서 야하다기보다는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