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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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얀거탑’은 최도영을 버렸나

D.H.Jung 2007. 2. 24.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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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혁이란 환타지를 위해 버려진 캐릭터들

‘권력을 향한 이전투구 끝에 외과과장이 된 장준혁(김명민)의 무한질주를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졌던 최도영(이선균). 그러나 최도영이란 캐릭터는 아직까지도 장준혁의 까칠한 눈빛 속에 가려져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소송을 포기하려는 고 권순일씨의 처를 막기 위해 변호사 사무실로 달려갈 때만해도, 또 거기서 장준혁에게 “왜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하는데? 나도 내 소신대로 해.”라고 말할 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법정에 선 최도영의 모습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란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런데 최도영이란 캐릭터에서 느끼게 되는 ‘어떤 기대감 → 실망감’은 이번만이 아니다. 그것은 드라마 초기부터 내내 있어온 것들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김명민의 카리스마 연기가 더 돋보여서가 아니다. 한 회 분량에서 거의 대부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김명민과 잠깐 잠깐씩 등장하는 이선균을 같은 선상에 놓고 연기력으로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이것은 캐릭터의 성격이라든지 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연기자 같은 캐릭터 내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 캐릭터의 비중을 설계할 때부터 의도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결과로 보면 최도영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 설정되지 않았다. ‘장준혁 vs 최도영’이라는 대결구도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말이다.

드라마가 캐릭터를 그려내는 과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모든 카메라의 시선은 장준혁에게 포커스를 맞췄다. 그 이유는 당연하다. 주인공이니까.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장준혁이 그냥 주인공이 아닌 ‘악역을 해야하는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캐릭터의 경우, 그 주인공이 왜 그렇게 되었나가 드라마 전편에 깔리기 마련이다. 그리고 악마적인 캐릭터 중간에 간간이 인간적인 고뇌 같은 모습을 끼워 넣어 자신이 이런 이전투구를 하는 것이 ‘자신이 의도한 것이 아니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대부분 범법자가 주인공인 드라마, 영화에서 캐릭터를 세우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러니 이주완(이정길) 과장과의 초기 대결구도는 장준혁의 이런 캐릭터를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효과적인 설정이다. 장준혁은 여러 번 “내가 왜 이렇게 외과과장이 되려고 하는 지 아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드라마는 가끔 시골에 사는 어머니에게 전화하면서 보여주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줄 뿐 속시원한 이유를 말해주진 않는다. 막연히 배경도 돈도 없는 집에서 어렵게 자라 성공을 위해 노력해왔다는 인상만을 줄뿐이다. 그러나 3대째 의사집안인 이주완이 장준혁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설정이 엮이자 이 막연한 설정은 힘을 발휘한다. 시청자들은 기꺼이 장준혁의 성공을 위한 무한질주에 동참하게 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비호감으로 만드는 것들
그런데 반면 최도영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었을까. 장준혁이 수술대 앞에서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하고 공격적인 수술을 하고 있을 때, 최도영은 연구실에 앉아 있었다. 초반 드라마에서 최도영이 맡은 최대의 역할은 소아암 환자 ‘진주’를 돌보는 일이었다. ‘하얀거탑’에서 환자가 보이지 않은 것은 보다 많은 환자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 있는 캐릭터였던 최도영을 초반부에 거의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로지 진주에게만 집착하는 최도영이란 의사 캐릭터는 비현실적이고 공감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이런 캐릭터가 진지한 얼굴로 생명이니 뭐니 하는 ‘공자님 말씀’을 하는 모습은 장준혁의 카운터 파트로서 ‘선한 의사’의 캐릭터를 구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잘난 척하는’ 비호감 캐릭터의 면면을 형성한다.

최도영이란 캐릭터를 불리하게 만든 건 환자뿐만이 아니다. 이윤진(송선미)이란 또 다른 비현실적인 캐릭터와 엮이면서 그 이미지를 손상시켰다. ‘진짜 운동가도 아니면서 운동하는 척 하는’ 이윤진은 직업도 없고 오지랖 넓은 이해하기 어려운 캐릭터로 그려졌다. 드라마의 한 편에서 벌어지는 숨가쁜 정치싸움이 시청자들의 두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별로 의식하지 못했지만 왜 이윤진이 진주라는 환자 때문에 병원에 나오고 그 옆에서 같이 눈물을 흘리는 지는 드라마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왜 이윤진과 최도영의 멜로가 사라졌나
게다가 드라마는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묘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함께 술을 마시고 얘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하는데 이것 역시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환자 때문에’ 시간이 없어 며칠에 한 번 겨우 집에 돌아와 아내와 얘기할 시간도 없는 최도영이 전혀 상관도 없고 관심도 없는 이윤진과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어떻게 공감할 수 있을까. 이것은 법정드라마로 변신한 지금에 와서도 계속 이어진다. 왜 이윤진이 갑자기 권순일 환자의 일에 뛰어들게 되었고 지금처럼 그를 위해 변호사 사무실을 전전하는 지는 여전히 납득하기가 어려운 일이다.

차라리 이런 구도로 흘러갈 것이었다면 애초의 설정대로 이윤진과 최도영 사이에 멜로 라인을 끼워 넣었어야 옳다. 그렇다면 최도영을 쫒아다니는 이윤진이란 캐릭터에 이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윤진이란 캐릭터의 최초 설정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하지만 인술을 펼치는 학구파 의사 최도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를 사모하게 된다. 그는 유치원에 다니는 딸이 있는 유부남. 이성적으론 그러면 안 된다 생각하지만, 그럴수록 최도영에 대한 사랑은 점점 깊어만 간다.” 우리는 이윤진의 최도영에 대한 깊어만 가는 사랑을 전혀 느낄 수 없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혐의는 찾을 수 있다. ‘하얀거탑’이 처음 방영되었을 때 나온 폭발적인 반응, ‘멜로 없이도 된다’는 포지셔닝이 그 둘 간의 멜로를 막아버린 건 아니었을까.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자 이윤진이란 캐릭터도 버려지게 되었다.

대결구도보다는 환타지에 집중하는 ‘하얀거탑’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할 것은 현재 법정드라마 속에서 장준혁에 맞서는 순일 처(김도연)라는 캐릭터이다. 그녀가 남편의 죽음이 의료사고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취하는 태도는 수동적이다. 그저 눈물로 호소하는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 몰입되어 있는 시청자들에게 눈물은 그다지 호감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좀더 이성적인 대응이었다면 그녀의 캐릭터는 공감과 호감을 끌어냈을 것이다. 반면 그녀 앞에 ‘피도 눈물도 없이’ 선 장준혁이란 캐릭터는 점점 공고해지게 마련이다. 그러니 이런 싸움에서 누가 이긴들 그것이 드라마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게 된다. 만일 장준혁이 진다면 사필귀정의 의미보다는 그 캐릭터에 대한 동정심만 더 커질 것이다. 장준혁은 이겨도 이기고 져도 이긴다는 말이다.

‘하얀거탑’이 최도영이란 캐릭터에 비중을 주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윤리적인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장준혁이라는 환타지를 통한 카타르시스에 더 초점을 맞춘 결과이다. 집안도 배경도 없는 장준혁이 성공을 향해 무한질주 하는 모습. 거기서 부서지고 망가지더라도 한번 끝까지 가보는 것. 우리 같이 매달의 생활을 걱정하는 소시민들이 선이든 악이든 한번 미친 듯이 해보고 싶은 그 상승욕구를 드라마 속에서 풀어보는 것에 더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치열한 대결구도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장준혁의 독주를 그리고 있다. 그 과정에 나타나는 많은 인물들이 있지만 그들을 싸워 이기든지 혹은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장준혁은 계속 높은 거탑을 향해 올라간다. 그럼에도 시청자들이 최도영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걸면서 대결구도로 드라마를 읽어보게 되는 이유는 속에서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권력에 대한 욕망 속에서도 ‘정말 이래도 되나’하는 자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