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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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김상중과 박근형에 주목하는 이유

D.H.Jung 2012. 7. 5.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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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왜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 집착할까

 

루저와 약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흔히들 변변한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배경도 없어 그저 그렇게 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을 낮추어 루저(패배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들이 왜 이런 상황에 몰렸는가를 사회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루저란 표현은 지나치다고 여겨진다. 이들은 열심히 노력했지만 이 태생적으로 모든 게 정해져버리는 부조리한 세상 속에서 사회적 약자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추적자>에서 백홍석(손현주)은 사회적 약자인가 아니면 루저인가.

 

'추적자'(사진출처:SBS)

아마도 우리의 도덕적인 의식은 백홍석을 사회적 약자라고 부를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인 선택이 진실인 것은 아니다.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백홍석이라는 인물에 대한 깊은 연민과 동정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이 끊임없이 권력의 힘에 의해 당하기만 하는 인물이 어딘지 답답하게 여겨질 수 있다. 사실 <추적자>라는 드라마가 백홍석과 강동윤(김상중)의 대결구도로 끝까지 달려가지 않고 중간에 갑자기 강동윤과 서회장(박근형)의 대결구도로 바뀐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백홍석이라는 사회적 약자가 끊임없이 실패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루저 같은 이미지로 바뀌게 되면 드라마의 매력 또한 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중반을 넘어서면서 <추적자>에 더 집중되는 관심은 백홍석과 그가 밝혀내려는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가 강동윤과, 그를 막는 것과 도와주는 것 사이에서 주판을 튕기고 있는 서회장 사이에 벌어지는 팽팽한 대결구도다. 과연 강동윤은 서회장과의 정치적 대결을 이겨내고 대통령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서회장이 강동윤의 야심을 무참히 꺾어버릴 것인가. 최근 몇 회 동안 <추적자>에 보인 언론의 관심은 백홍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회장과 강동윤을 위시하여 그 변화를 만들어내는 서지수(김성령), 신혜라(장신영) 같은 인물들이 보여주는 반전드라마였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이 뻔해 보이는 반면,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은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이렇게 되자 기묘한 상황이 생겨난다. 백홍석과 강동윤의 대결지점에서 강동윤이란 인물은 절대적인 악으로 위치하지만, 강동윤과 서회장의 대결에서는 다르게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발사 아버지를 둔 소시민의 아들 강동윤의 성공스토리가 그 안에는 깔려 있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했던 이 인물은 어쩌면 우리네 근대사의 아버지들을 표징하는 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강동윤이란 인물에 묘한 동정심을 갖게 된다. 무표정한 얼굴, 그 뒤에 놓여진 처절함 같은 것.

 

우리는 드라마를 통해 강동윤 같은 인물을 만난 적이 있다. <하얀거탑>의 장준혁(김명민)은 대표적인 사례다. 성공하기 위해 뭐든 하고, 누구와도 손을 잡는 속물적인 인간이지만 많은 대중들은 그가 그토록 성공하려는 그 마음을 동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인물은 남성 캐릭터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넓은 의미에서 이들과 같은 부류다. 성공을 향한 강력한 욕망과 그 좌절의 캐릭터. 이런 부류의 캐릭터들에 열광하는 건 아마도 우리네 불행한 근대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강동윤의 말처럼 “마차가 달려가다 보면 바퀴에 벌레가 밟히기도 한다”는 것이 우리네 개발시대의 정서가 아니었던가. 그렇게 발밑과 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살피지 않고 강박적으로 앞만 보고 달려온 우리네 아버지들. 우리가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래서 양가적이다. 어떤 이들이 개발의 결과를 놀랍도록 눈부신 성장으로 바라보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 개발이 누군가를 짓밟은 결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바라보는 양가적인 시선과 겹쳐진다.

 

물론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추적자>라는 이전투구의 장에서 없어서는 안 될 구원 같은 존재다. 사실상 강동윤과 서회장의 복마전이 허용되는 이유는 백홍석이라는 절대적인 선이 한 편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이지만 가해자가 되어 쫓기고 있는 그가 눈앞의 진짜 가해자에게 총을 겨누고 있으면서도 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문제 해결 방식이 단순한 복수에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진실을 밝히겠다는 것. 백홍석은 그저 서민을 대변하는 아버지처럼 보이지만 이 부분에서는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선 인물처럼 보인다. 자식을 죽이고 아내마저 죽게 만든 장본인을 눈앞에 두고 복수가 아닌 진실을 선택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까.

 

하지만 이 절대 선으로서의 백홍석이라는 인물보다 강동윤이라는 인물에 주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추적자>를 단순한 추적 장르물이나 복수극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아프게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장과 성공에 대한 갈망(아마도 그토록 빠른 근대화를 가져오게 했던 동인이었을)과 그 결과로서 생겨난 희생들에 대한 죄의식이 겹쳐져 있다. 백홍석이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인물이라면, 강동윤은 여전히 욕동하고 있는 그 성공에 대한 갈망을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당신은 어떤 인물을 추적하고 있는가. 백홍석인가 강동윤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