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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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김기덕이 그린 자본의 풍경

D.H.Jung 2012. 9. 12.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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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의 <피에타>가 보여주려는 것

 

“돈 받아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인간백정 같은 놈...”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피에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강도(이정진)에게 그의 고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주의 말대로 강도는 빌려간 돈을 받아내기 위해(이자가 무려 열배에 가깝지만) 청계천 공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험에 들게 하고는 손목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식으로 돈을 갚게 한다. 말 그대로 인간백정 저리 가라 하는 인물이다.

 

'피에타'(사진출처:김기덕필름)

<피에타>가 이 인간백정을 내세운 것은 돈이라는 기괴한 장치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폭력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용주는 강도에게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돈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강도를 시켜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숨겨지고 체감되지 않는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병신을 만든 건 강도의 짓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

 

이 짧은 장면은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치환시켜주는 돈이란 괴물은 모든 단면들을 말끔하게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영화 속 자살을 결심한 한 사내가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계단에서 이제 사라져버릴 청계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죽기 직전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던 그 공장들은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밀어내지고 저 멀리 세워진 빌딩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이다. 마치 한 노동자의 손목이 말끔하게 잘려져 버리는 것처럼.

 

그 땅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한 때 과도하고도 조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제 손목을 자본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지금의 자본의 풍경이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 무덤들이 세워졌던가.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는 돈을 갚지 못해 손목을 대신 저당 잡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태어나는 자식 앞에서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 그것으로 받아낼 수 있는 보험금으로나마 자식에게 이 손 무덤의 노동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저 강도의 고용주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그저 돈을 받아오라고 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것도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것은 강도가 그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으려고 한 그들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가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돈을 빌려준 자는 받는 것이 정당하고 빌린 자는 갚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든 게 정당화된다.

 

돈의 논리가 지상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죽음이 만연하지만 그 죽음은 돈 뒤에 가려진다. 자본이 자연을 인공으로 채울 때, 생명은 죽어나가기 마련이 아닌가. 나무들이 뽑혀져 나간 후에야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들은.

 

<피에타>는 원경에서 보면 스카이라인과 랜드마크로 웅장하게 보이는 그 말끔한 도시의 빌딩이 주는 안온함을 들춰내고, 근경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폭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다. 말끔한 도심의 이면에 놓여진 쓰레기더미와 비닐하우스촌, 방치되고 버려지는 공장의 기계들, 그 기계에 기대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 그 기계에 제 살을 집어넣어야 살 수 있고, 급기야 그 기계에 몸을 걸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영화다.

 

<피에타>는 바로 이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 한 축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오는 모성은 과연 이 폭력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남자와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대결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끝단이 만들어낸 자본의 살풍경이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폭력과 모성의 대결로 다뤄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피에타>는 우리 모두가 돈이라는 자본의 장치에 얽매여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 저편의 세계를 불편한 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저예산 영화가 자본 앞에 처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채워지는 멀티플렉스들 그 이면에 놓여진 작은 영화들의 절규. 영화 속에서 자살을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일기장에 마구 거칠게 적어놓은 것처럼,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넌 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