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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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조승우 만큼 말에 집중되는 이유

D.H.Jung 2012. 10. 17.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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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의', 왜 하필 말인가 했더니

 

“하지만 생명이잖아요.” 칼에 찔려 죽어가는 말을 살리기 위해 사암도인(주진모)을 찾아갔으나 자신은 인의(人醫)지 마의(馬醫)가 아니라며 거부하는 그에게 어린 백광현(안도규)은 이렇게 되묻는다. 그러자 사암도인은 백광현에게 말이든 사람이든 생명에 귀천은 없다고 말한다. 그 생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함부로 시술을 하지 않는다는 것. 바로 이 짧은 장면은 <마의>가 왜 하필 말이라는 소재를 선택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사극에서 말은 바로 민초의 다른 이름이다.

 

'마의'(사진출처:MBC)

마의들의 삶이란 어찌 보면 말보다 천시 받는 삶이다. 말이 날뛰다 이명환(손창민)의 아들 이성하(남다름)를 발로 차는 사고가 벌어지자 그 말을 관리한 마의들(이희도, 안상태)은 호위무사에게 끌려간다. 자신들의 직접적인 잘못은 없지만 반가의 자제를 다치게 했다는 것에 “반쯤 죽여 놓아야” 직성이 풀리는 족속이 양반들이기 때문이다. 끌려가면서 안상태는 자신은 마의가 아니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한다. 어렸을 때부터 말똥만 치우며 살았을 뿐이라는 것. 우스운 설정이지만 그 얘기는 짠하게 다가온다. 마의들의 삶이 거기서 느껴지기 때문이다.

 

말과 마의로 대변되는 민초들은 그래서 이 사극에서는 거의 동격처럼 그려진다. 화살을 맞고 죽음이 경각에 몰려 목장에 들어온 광현이, 새끼를 잃어 시름시름 죽어가는 말과 한 마구간에서 만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말은 잃은 새끼처럼 광현을 보살피면서 다시 살아나고, 광현은 말의 보살핌을 받으며 환영처럼 아버지(사실은 사암도인이었지만)가 나타나 자신을 고치는 꿈을 꾼다. 이 장면은 말과 마의의 교감을 보여준다. 작금의 수의사라면 그다지 큰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수 있지만, 조선 후기의 수의사는 다르다. 말 못하는 짐승들과 그들이 동병상련의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따라서 말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그 말과 인간의 교감이 벌어지는 이 시퀀스들은 <마의>가 가진 여타의 사극들과의 차별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승우가 백광현의 성인역으로 등장하는 것만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말에 관련된 에피소드가 관심을 끄는 것은 그 때문이다. 말은 그간 사극 속에서 묵묵히 누군가를 태우고 달리고 있었지만 그 존재감을 드러내지는 못했었다. 이것은 마치 왕조 사극들이 왕과 신하들의 이야기를 전면에 보여줄 때 가려져버린 민초들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말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것은, 그리고 그 말과 인간의 교감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토록 전복적인 느낌을 선사한다.

 

말은 또한 그 자체로도 다이내믹한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말을 사고 파는 마택일에 목장에서 벌어지는 마상쇼는 <마의>의 스펙터클을 잘 보여준다. 초원 한 가운데 오밀조밀 세워진 목장과 마택일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장애물을 뛰어넘고 말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기수들이 마치 하나의 쇼를 구성하는 듯한 장면들은 이병훈 PD 특유의 연출력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말이 가진 스펙터클보다 중요한 것은 말이 가진 의미다. 저 어린 백광현이 말한 것처럼 말은 인간과 똑같은 하나의 ‘생명’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와 위계가 생명이라는 동일한 가치로 인해 사라지는 지점에 이르면, 왜 이타촌(외국인들이 사는 마을)이 이 사극에 들어와 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서양인들까지 들어와 하나의 인종의 용광로처럼 섞여있는 이타촌은 민족과 인종의 경계가 허물어진(혹은 허물어져 가는) 한 세계를 잘 표상한다. 동물이든 인간이든(그것이 어떤 민족이든 상관없이) 하나의 생명으로 바라보는 백광현은 그래서 글로벌한 현 시대가 갖는 다양성의 가치를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의>에서 말이 갖는 의미는 이토록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