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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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과 '남영동', 왜 속 시원한 복수가 없을까

D.H.Jung 2012. 12. 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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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과 <남영동>, 영화가 해줄 수 있는 것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영화는 과연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무고한 시민이 정부에 의해 고문당하고 심지어 백주 대낮에 무자비하게 학살당하는 일이 자행되었던 80년대. 영화는 그 시대를 불러와 무엇을 환기시킬 수 있을까. <26년>과 <남영동 1985>는 그 시대의 상처를 애써 들춰낸다. 모든 게 시간에 의해 덮여져버린 듯한 그 아픔과 고통을 굳이 2013년을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놓는다.

 

사진출처: 영화 '26년'

영화는 고통스럽다.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1985년 불법 연행되어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간 고문을 당한 사실을 다룬다. <26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잔인하게 희생당한 유족들이 모여 당시 모든 걸 진두지휘했던 ‘그 사람’을 단죄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적으로 각색된 부분은 있지만 이 두 영화의 근거로 제시되는 상처는 사실 그대로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두 영화 모두 그다지 시원스런 복수극을 보여주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남영동 1985>는 시종일관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은 살려 달라 애원하고는 거짓말을 한 자신을 탓하며 그 진술을 번복하고 또 고문을 당하는 한 남자를 바라봐야 한다. 역사가 증언하듯 그 남자는 후에 존경받는 정치인이 되지만 그를 고문한 사내는 교도소에 수감된다. 상황이 역전되어 두 남자가 만나게 되지만 그렇다고 고문당했던 남자의 토로나 시원스런 주먹다짐 하나 나오지 않는다.

 

<26년>도 마찬가지다. 광주를 겪으며 살아가는 유족들의 아픔은 끝없이 반복되어 보여지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경호를 받으며 교통신호등 하나 걸리지 않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복수의 순간 앞에서도 진심을 담은 사죄를 요구하는 이 유족들의 총구는 심하게 흔들린다. 결국 영화는 차가운 총성과 함께 암전 처리되고 여전히 경호를 받고 살아가는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답답한 결말이다.

 

모두 80년대의 아픔을 다뤘고, 또 죽이고 싶은 당대의 가해자들을 세우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두 영화의 연출은 상이한 차이점을 보인다. <남영동 1985>는 극적인 스토리 전개 자체를 극도로 자제한 인상이 강하다. 고문 장면에 있어서 더 가학적인 일들이 당시 대공분실 안에서 벌어졌지만 영화는 그런 부분들조차 단순화해서 보여준다. 당연한 선택이다. 이 영화는 고문 그 자체를 목적으로 다루는 영화가 아니니까.

 

반면 <26년>은 상당히 극화된 장르적 스토리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조폭의 이야기도 들어있고 스나이퍼의 이야기도 들어있으며 형사물의 클리쉐도 들어가 있다. 실제 1980년 광주의 그날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되어 있고, 그 후에 상상으로 재구성된 26년의 이야기는 실사다. 거짓말 같은 현실과 진짜 같은 가상이다. 이 연출 역시 당연해 보인다. <26년>은 그 날 이후 지워질 수 없는 아픔을 가진 이들의 염원이자 갈망이 담겨진 상상의 소산이니 말이다.

 

<남영동 1985>와 <26년> 그 어디에도 속 시원한 복수극은 없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당대의 아픔이 ‘살아남은 자들’의 카타르시스를 위해 제공될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신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은 그 지독한 아픔이며, 여전히 가시지 않는 고통과 부채감이다. 그래서 보기 힘겨운 그 장면들을 꾸역꾸역 바라봐야 한다. 그 미진한 아픔을 나눠 가진 채 영화관을 나서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이 두 영화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영화관 안에서의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영화관 밖에서의 ‘선택’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