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출생의 비밀', 유준상이 전하는 ‘행복의 비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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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유준상이 전하는 ‘행복의 비밀’

D.H.Jung 2013. 5. 13.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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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없는 <출생의 비밀>, 그 진면목은

 

왜 제목을 굳이 <출생의 비밀>이라 했을까. 최근 막장드라마하면 바로 떠오르는 코드가 바로 ‘출생의 비밀’이다. 그런데 그것을 제목으로 세웠으니 <출생의 비밀>은 막장일까.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는 막장드라마들이 흔히 사용하는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출생의 비밀’ 코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물론 ‘출생’의 문제가 다뤄지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비밀’이다. 정이현(성유리)에게서 어느 날 사라져버린 10년 간의 기억. 그 속에 담겨진 비밀을 찾아가는 드라마가 바로 <출생의 비밀>이다.

 

'출생의 비밀'(사진출처:SBS)

자고 일어났더니 10년 간의 기억이 사라졌다는 설정은 파격적이다. 무언가 엄청난 충격을 겪은 후, 정이현은 스스로 기억을 봉인해버렸던 것. 깨어나 보니 굴지의 예가그룹 총수 최석(이효정)이 작은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그녀에게는 잘 나가는 커리어우먼의 삶이 펼쳐진다. 하지만 그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남편 홍경두(유준상)가 찾아오고 그는 딸 해듬(갈소원)을 그녀가 낳았다는 걸 인정하라고 종용한다.

 

즉 이 드라마는 기억으로 나눠진 두 개의 인생 사이에서 정이현이 갈등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이 두 인생이 완전히 상반된 가치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홍경두와 해듬이로 대변되는 잊혀진 기억 속의 삶은 가난해도 인간적인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세계다. 홍경두는 가난하지만 순박한 진심을 가진 남자. 거칠어도 인간 냄새가 풀풀 나는 인물이다.

 

반면 예가그룹 최석의 집안은 부유하지만 가족의 정이 전혀 없는 세계다. 정이현의 친구로 예가그룹의 장남 기태(한상진)와 결혼한 선영(이진)은 정이현에게 자신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남편 기태는 그녀를 유령인간 취급하고 시어머니 조여사(유혜리)는 그녀를 사사건건 무시하며 시아버지 최석은 걸핏하면 폭언과 폭력을 일삼아 그녀를 극도의 불안 증세에 빠뜨린다. 즉 부유하지만 불행한 현재의 기억 속의 삶과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잊혀진 기억 속의 삶 사이에서 정이현은 갈등하게 된다.

 

정이현이 모든 것을 보기만 하면 다 외워버리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라는 것은 그래서 아이러니다. 모든 걸 기억해내는 그녀지만 10년 간의 기억이 지워졌다는 것은 기억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모든 걸 기억해내는 능력은 천부적인 재능처럼 여겨지지만 그 망각 없는 기억은 어떤 삶의 충격에 있어서는 잊혀지지 않는 천형이 되기도 한다는 것. 정이현이 10년 간의 기억을 스스로 지웠다는 건 그래서 그녀의 포토그래픽 메모리 능력의 반작용인 셈이다.

 

<출생의 비밀>은 그래서 인생의 행복은 결국 기억의 문제가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질문하는 드라마다. 우리는 결국 기억이라는 가녀린 능력에 의지해 삶의 행복과 불행을 저울질 하고 있으니 말이다. 좋은 추억들이 모여서 행복한 삶이 기억되는 것이고, 충격적인 사건들이 모여 불행한 삶이 기억되는 것은 아닐까. 가슴이 터질 듯한 홍경두의 바보 같은 진심은 그래서 정이현이 누리고 있다 생각하는 행복의 허상들을 사정없이 부수고 있는 중이다.

 

<출생의 비밀>은 그래서 화려한 부의 허상 앞에 행복의 실체를 놓치고 살아가는 수많은 현대인들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드라마다. 요즘 사람 같지 않은 경두의 진심을 보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잊고 있던 행복을 다시 되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제목이 <출생의 비밀>이지만 이 드라마에 이른바 막장드라마에서 활용하는 ‘출생의 비밀’ 코드는 발견하기가 어렵다. 대신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는 삶의 비밀이다. 정이현의 잃어버린 기억처럼 현대인들이 잊고 있던 그 ‘행복의 비밀’을 우리는 어쩌면 <출생의 비밀>에서 발견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