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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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을 다루겠다면 이 정도는 돼야

D.H.Jung 2013. 6. 11.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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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의 비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경두, 다만 기억 못할 뿐

 

“경두씨가 얼마나 바보 같은 남자냐면요. 자기를 버린 아버지의 여자를 돌봐요. 몸도 성치 않은 노인네를 어떻게 혼자 두냐며, 그쪽의 아버지를 돌본다구요!” 경두(유준상)를 짝사랑하는 연정(조미령)은 이현(성유리)에게 이렇게 외친다. 이현에게 이제는 경두의 정을 떼어 달라고 부탁하러 온 연정이지만 그녀가 전하는 말 속에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경두 같은 남자에 대한 절절한 마음이 묻어난다.

 

'출생의 비밀(사진출처:SBS)'

“나는 어디선가 마음이 베었을 때 경두씨가 제일 먼저 생각나요. (중략) 뭔가에 마음이 다쳐 가라앉아 있으면 경두씨 안절부절 못하죠. 무슨 이유인지도 모르고 왜 그렇게 됐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저 사람한테 어떻게 해줘야 하나 어떻게 해주면 저 사람이 다시 웃을까 그 바보처럼 쩔쩔매는 모습만 봐도 벌써 위로가 되죠. 어떻게 세상에 그런 남자가 있을 수 있는지. 전 남편한테 맞고 살았던 나는 경두씨 같은 남자가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경두는 그런 남자다. 아내였던 이현이 딸과 자신을 버린 채 사라져버려도, 또 기억에서조차 지워버려도 그는 그녀를 위해 그녀가 좋아했던 만두를 챙기는 바보 같은 위인이다. 금쪽같은 딸 해듬이(갈소원)를 그녀가 데려간다고 했을 때도 그녀와 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의 자리를 비워주고는 뒤에서 눈물을 훔치는 바보 중의 바보다. 그러면서도 수박 한 조각을 봐도 먼저 그녀를 떠올리고 혹 아프다는 얘기를 들으면 단박에 달려와 그녀를 위해 죽과 콩나물국을 끓여내는 남자다. 자신을 버리고 딸마저 데리고 떠난 여자의 아버지를 돌보는 남자. 연정이 말하듯 경두는 주변사람들을 웃게 해주기 위해 늘 쩔쩔맨다. 도대체 이런 사람이 있을까.

 

<출생의 비밀>은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경두라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을까. 그리고 이런 착하기 그지없는 인물을 내세우면서 왜 제목을 흔히 막장드라마들이 줄곧 사용하는 클리쉐에서 차용한 것일까. 즉 <출생의 비밀>은 제목과는 달리 막장드라마들이 사용하곤 하는 클리쉐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아니 정반대의 길이다. 경두라는 캐릭터가 말하는 ‘출생의 비밀’이란 현재 막장드라마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족을 파탄내는 그런 코드가 아니다. 오히려 파탄 난 가족을 다시 묶어내는 방식으로서의 ‘출생의 비밀’이다.

 

사실 친 부모는 누구였고 그 친 부모가 재벌가의 회장님이었다는 식의 천박한 천민 자본주의식의 신분상승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출생의 비밀’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신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출생의 비밀’은 이 땅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출생의 비밀’을 말한다. 누구나 ‘내가 어떻게 태어났지’하고 물을 때 갖게 되는 그 ‘출생의 비밀’, 바로 누군가의 절절한 사랑 말이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들의 보이지 않는 배려와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든 주변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 발을 동동대는 경두만 봐도 마음 한 구석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그 캐릭터가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어떤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갖고 있는 출생의 비밀 속에 어른대는 경두 같은 인물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게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점점 기억에서 지워버린 그 출생의 비밀을 이 드라마는 그래서 경두라는 인물을 통해, 또 해듬이라는 아이를 통해 우리에게 다시 떠올리게 해준다. 과거의 행복했던 기억을 잃어버린 존재, 이현은 바로 우리들 자신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녀가 차츰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도 어쩌면 각자 갖고 있었지만 기억 저편으로 잊혀져갔던 경두 같은 인물의 끝없는 사랑으로 존재하는 자신, 즉 각자의 ‘출생의 비밀’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경두가 해듬이에게 너는 이담에 커서 뭐가 될 거냐고 묻자 해듬이는 엉뚱하게도 ‘가지’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왜 가지는 가지고, 오이는 오이고...(중략) 왜 가지는 보라색이고 오이는 연두색이고...(중략) 유전이를 공부하면 다 안댜.” 할아버지가 그랬듯 유전을 공부하고 싶다는 것이다. 경두가 해듬에게 ‘유전’이가 누구냐고 묻자 해듬이 말한다. “누구가 아니구요. 홍경두가 홍해듬을 낳고 포목점 할머니가 연정 아줌마를 낳고 태만이 아저씨네 개가 애기 개를 낳으면 애기 개가 엄마 개를 닮는 게 유전이여.”

 

실로 복잡하게 뒤엉킨 ‘출생의 비밀’을 자극적인 코드로 다루는 드라마들이 많지만 정작 진정한 의미의 ‘출생의 비밀’을 다루는 드라마는 전무하다. 이것은 어쩌면 자극적인 것들만 기억에 남게 되어버린 작금의 세태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태어나 닮아간다는 이 단순하지만 신비롭고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출생의 비밀’은 그래서 더욱 귀한 가치를 지닐 것이다. 드라마 <출생의 비밀>은 이렇게 현 세태가 오독시키고 있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를 기분 좋게 뒤집고 있다. 실로 ‘출생의 비밀’을 다루겠다면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