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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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대중들은 트루먼쇼를 원한다

D.H.Jung 2007. 4. 2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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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에서 ‘무릎팍 도사’까지

짐 캐리가 트루먼으로 나온 영화,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는 거의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트루먼의 샐러리맨으로서의 삶과 사랑은 그 자체로 드라마이며, 그가 술집이든 집이든 직장이든 누군가를 유쾌하게 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농담은 그 자체로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트루먼이 매력적인 것은 굉장한 스타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이 트루먼을 24시간 엿보는 것만으로 감동과 슬픔, 분노, 행복, 유쾌함, 웃음 같은 TV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게된다. 이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 TV가 변화하고 있는 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TV라는 가상의 세계는 점점 더 실재의 세계를 넘보고 있고 그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리얼리티’를 부르짖는다.

‘무한도전’, 쇼를 하라! ‘생(生)쇼’를 하라!
‘무한도전’이 ‘리얼버라이어티쇼’를 주창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면면히 방영되어온 리얼리티쇼의 새로운 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전 리얼리티쇼의 대부분은 이른바 사연을 보낸 시청자의 문제를 풀어주는 솔루션 리얼리티쇼였다. “이랬던 집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하면 와하며 놀라는 얼굴로 감동하는 사람들. 대표적인 솔루션 리얼리티쇼가 ‘러브하우스’였다. 이것은 국민공감프로젝트란 기치를 걸고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던 ‘느낌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루션 리얼리티쇼에서 연예인들은 도우미의 역할이었지 어디까지나 그 중심은 사연을 보내온 시청자들의 리얼리티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 와서 그 리얼리티는 연예인 당사자에게 맞춰진다. 유재석, 정준하, 박명수, 노홍철, 하하, 정형돈으로 구성된 연예인단에게 미션이 떨어지고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가감 없이(?) 담는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의도. 그간 오락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기획 연출된 재미에 질력이 난 시청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필요한 것은 던져진 상황에 따라 넘치는 끼로 재미를 만들어 가는 캐릭터이지 기획된 대본에 맞춰 대사를 읊는 출연자가 아니었다. 연출보다 중요해진 것은 순발력과 애드립이었다. 좌충우돌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져야 했기에 자막은 또 하나의 출연자가 되었다. 그 틀 안에서 여섯 명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트루먼처럼 생(Live, 生)쇼를 한다. 그 안에서는 유재석과 마봉춘 나경은 아나운서와의 열애사실 같은 개인적인 사생활도 가십처럼 쏟아져 나온다. 연예인의 리얼리티쇼라는 점에서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시 프로그램 안에서도 다루어진다.

리얼리티에 도전한 ‘무한도전’의 한계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저 트루먼처럼 날 것의(生) 쇼일까. 여기에 ‘무한도전’이 갖는 리얼리티쇼로서의 의미와 한계가 드러난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리얼리티란 진짜 개인으로서의 맨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실제 얼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그것이 실제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보통의 TV스타들이 당시 지향하던 신비주의의 반대방향으로 ‘무한도전’은 무한질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을 거쳐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과거와 달리 ‘굴욕을 당하는’ 현재의 캐릭터들로 만들어졌다. 그 굴욕은 도전이란 의미로 상쇄되고 그 도전은 반응을 끌어내면서 각자에 맞는 캐릭터가 창출되었다. 출연자들의 캐릭터는 끌어내려지면 내려질수록 리얼리티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문제는 ‘무한도전’이 인기를 끌면서 그 출연자들 역시 인기가 상승되었다는 데 있다. 인기를 얻기 전의 굴욕적인 모습들은 더 이상 ‘무한도전’ 속에서 다루어지기 어려워졌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이 리얼리티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자가당착이다. 무한도전은 이미 톱스타가 되어버린 캐릭터들의 리얼리티에 걸맞는 도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패션모델이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톱스타가 톱스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자 ‘무한도전’의 리얼리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청률 하락의 원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트루먼쇼화 되어 가는 TV의 모습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과도기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어쨌든 식상한 기획 프로그램을 넘어서기 위해 TV의 리얼리티라는 미션을 두고 벌인 ‘도전 한 판’은 성공적인 셈이다. 이제 그 바통은 ‘무릎팍 도사’가 이어받는다.

도사가 무릎 꿇린 연예인의 맨 얼굴
무릎팍 팍팍! 이 단순한 구호는 마치 주문 같다. 이 주문 앞에 연예인들이 그간 숨겨온, 혹은 숨기고 싶었던 맨 얼굴은 TV라는 마법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공개된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폭탄선언을 한 연예인들의 말들이 기사가 되어 뉴스를 장식한다. 쇼는 쇼일 뿐이라고? 적어도 ‘무릎팍 도사’의 경우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쇼는 바로 리얼리티며, 그 리얼리티는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의 일상처럼 연예인들의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기사거리가 된다. 현실과 쇼가 묘한 동거를 시작하는 곳, 바로 ‘무릎팍 도사’라는 코너다.

형식은 간단하다. 연예인이 도사 앞에 질문을 가지고 등장하고, 무릎팍 도사 강호동과 거만한 도사 유세윤, 그리고 올라이즈 밴드는 거침없는 질문공세를 퍼부어 출연자의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인터뷰 형식이 대결구도를 가진다는 점. 무릎팍 도사 측은 출연자가 얘기하지 않으려는 당혹스런 부분을 끄집어내 진실(?)을 밝히려 하고 출연자는 거기서 벗어나려 때론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론 공세를 취해 강호동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시도는 이미 ‘야심만만’을 통해 실험된 적이 있다. ‘야심만만’은 어떤 안건에 대하여 마치 설문조사를 하는 듯 포맷이 구성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질문들을 통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야심만만’은 질문 자체나 출연자를 영화나 드라마 홍보의 수단으로 만들면서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한없이 떨어뜨렸다. ‘무릎팍 도사’는 리얼리티 떨어진 ‘야심만만’이 갖고 있는 약점을 대결형식과 좀더 과감해진 질문, 그리고 인터뷰형식의 관건인 적절한 출연자 선정으로 보완한다. ‘연예인의 맨 얼굴 드러내기’라는 리얼리티쇼의 본질을 ‘야심만만’처럼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무릎팍 도사’, 연예인 탈신비주의와 손잡다
질문은 시청자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노골적인 질문공세는 마치 저 ‘제리 스프링어쇼’를 연상할 정도.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연예인들이 왜 무릎팍 도사의 부름에 기꺼이 출연해 무릎을 꿇는 것일까. 그것은 달라진 연예인들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다. 이제 연예인들은 더 이상 스타로서 저 하늘 꼭대기에만 있어서는 전혀 빛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의 스타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을수록 빛을 발했다면, 현재의 스타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여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연예인들의 스타로서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와 함께, ‘생얼’과 깨는 이미지의 ‘직찍사’가 유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는 연예인들의 신비주의가 이제는 위험한 이미지 관리방법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한몫을 차지한다. 누구나 손에 휴대폰이라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그렇게 우연히 찍힌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유포되는 세상에서 신비주의를 주창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온 새로운 전략은 신비주의와 탈신비주의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다. 이효리는 뮤직비디오와 스테이지 위에서는 섹시코드의 대명사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바로 탈신비주의로 돌아간다. 편안한 누나 같고 털털한 여자친구 같은 이미지를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가 ‘무릎팍 도사’와 거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무릎팍 도사’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또한 달라져야 하는 연예인의 탈신비주의 전략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는 누구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털털한 보통사람이 되는 마법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과거 방송을 통해 어떤 문제를 일으켰거나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들은 기꺼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감췄던 그 문제를 오히려 들추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릎팍 도사’는 살벌한 질문들을 통해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한바탕 살풀이를 하게된다. ‘무릎팍 도사’의 복장과 캐릭터 설정이 신기 오른 무당을 표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살풀이를 하는 기능과도 맞닿는다.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그런데 TV 속에서 벌어지는 이 살풀이는 그저 쇼가 아니다. 다음날이면 대문짝만하게 인터넷을 장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 역시 저 ‘무한도전’이 그러했듯이 연예인들의 실제 맨 얼굴이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청자와 연예인이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것은 리얼리티가 된다.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속의 출연자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해 그들의 인기상승과 함께 프로그램의 인기하락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진 반면, ‘무릎팍 도사’는 매번 외부인물을 끌어다가 인터뷰 배틀이란 형식으로 외부 출연자의 리얼리티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고정 출연자에게 있다.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하는 질문이 과연 진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해명을 위한 질문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후자로 가게된다면 이 트루먼쇼는 가짜임이 판명날 것이고 그 결과는 저 ‘야심만만’이 가게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TV는 더 이상 그저 그 앞에 사람을 멍한 표정으로 앉혀놓는 상자가 아니다. TV 속의 ‘난장이들’은 이제 현실세계로 빠져나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화면 속에 비춰지는 세계는 화면 밖의 세계가 되었다. 쇼가 일상이 되었다는 걸 알리듯 TV는 소리친다. 쇼를 하라! 생쇼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