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고맙습니다’, 그 부끄러운 반어법 본문

옛글들/명랑TV

‘고맙습니다’, 그 부끄러운 반어법

D.H.Jung 2007. 5. 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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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부르는 ‘고맙습니다’의 드라마 화법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를 그저 훈훈한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그것이 반쪽 짜리 정답이었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 ‘고맙습니다’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들 모두를 부끄럽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선행을 담은 이야기가 인터넷에 대서특필됐을 때, 따뜻해지는 가슴과 함께 밀려오는 부끄러움 같은 것이다.

작은 이야기에도 민감해지는 건, 그만큼 감동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다는 반증. ‘고맙습니다’는 이 감동 없는 세상에 던지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반어법이다. “고맙습니다”라는 작은 한 마디가 가진 울림은, 그런 한 마디 해주지 못하는 고맙지 않은 사회에 대한 통렬한 대결의식이 된다. 당신은 과연 그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해본 적 있는가 하는 뼈아픈 질문이다.

그들의 고통은, 그들이 아닌 우리가 만들었다
미혼모에 치매 할아버지 그리고 에이즈에 걸린 딸이지만 이들만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을까. 봄(서신애)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이 알려져 마을사람들이 이들을 쫓아내려 할 때도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 영신(공효진)은 애써 웃으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한다. 에이즈에 걸렸지만 아이라는 점, 그리고 나이든 할아버지지만 치매라는 점이 이 모든 가족의 고통을 영신에게 지우지만, 그녀는 그 고통을 행복으로 치환하는 요인을 또한 그 가족에게서 찾는다. 그녀는 영신이가 아닌 봄이 엄마일 때, 미스터 리의 손녀일 때 가장 행복하고 강하다. 그러니 이 가족의 고통은 외부에서 볼 때 그렇게 보일 뿐, 그들의 실상은 다르다.

하지만 드라마 속에서 그들은 고통받는다. 그것은 그들을 그렇게 행복하게 가만 놔두지 않는 주변 사람들의 편견 때문이다. 영신네 가족이 원하는 것은 그저 푸른도에 발붙이고 사는 것이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에이즈에 걸린 어린아이를 괴물 보듯 대하고, 수혈을 받지 못해 죽어 가는 영신에게 그 누구도 헌혈을 하려들지 않는다. 이런 편견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부정이 아닌 긍정의 힘이다. 그들에게 누구도 ‘고마운 짓’을 하지 않지만 그녀는 늘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늘 미안한 짓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미안합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생물’이라 말하면서까지 자신이 당하는 고통스런 상황을 긍정하고 끌어안으려 한다.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
이것은 작가가 모진 세상에 거는 시비이다. “왜 그렇게 사느냐”는 우회적인 질문이면서도 그 어느 것보다 무서운 비판이다. 영신의 그런 행동은 그녀를 바라보는 민기서(장혁)의 시선을그대로 담은 드라마 주제곡 가사처럼 때론 바보 같고 때론 천사 같은 것이다. 그래서 민기서는 늘 그녀를 향해 고함친다. “왜 바보처럼 당하고만 사느냐”고. “고맙긴 뭐가 고맙냐”고. 이 민기서의 시선은 그대로 우리네 시청자들의 시선과 맞닿는다. 영신의 그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가슴이 먹먹하다가도 민기서의 마음처럼 답답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바보와 천사가 만나는 영신이란 캐릭터를 통해서 작가의 목소리는 더 신랄해진다. 이 말은 ‘천사처럼 사는’ 인간적인 삶을 ‘바보’로 여기는 세태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가 만약 영신의 행동에서 답답한 바보의 모습을 보았다면 거기서부터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아볼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무엇이 우리의 삶을 이다지도 영리하고 약삭빠르며 이기적인 것으로 만들었을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작가의 바람
드라마는 영신네 가족이라는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들이 현실적 상황 속에서 겪을 수 있는 고통의 단면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은 어찌 보면 잔인한 설정이 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시사다큐프로그램을 통해 보아왔던 실제 현실이라면 그 핍박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에 이르렀을 테니까. 하지만 작가는 이 각박한 현실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가 설정한 안전장치가 푸른도라는 가상의 섬이다. 편견 없는 사회, 약자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오가는 사회는 마치 기적처럼 일어나기 어려운 것이지만, 혹 이 섬에서라면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작가의 바람이다.

푸른도 마을 사람들의 면면들은 그래도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보다는 많은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간의 유대가 상대적으로 끈끈하다는 것. 부모들은 봄이가 에이즈라는 사실에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을 정도지만, 정작 아이들은 봄이를 걱정한다. 영신의 수혈을 위해 마을을 뛰어다니며 헌혈을 부탁하는 민기서의 행동은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지만, 적어도 그들을 갈등하게 만든다. 그리고 결국에는 저마다의 핑계거리를 들고 보건소로 찾아오게 만든다.

당신도 기적을 느끼셨나요
사람들의 편견이 깨지는 것, 그것은 이 드라마가 원하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위해서 작가가 만들어낸 영신과 봄이, 그리고 미스터 리라는 캐릭터는 푸른도 사람들을 향해 온몸을 내던진다. 그들이 던지는 것은 생명(봄이의 에이즈, 영신의 과다출혈 같은 상황)이기에 그들의 전부가 된다. 푸른도 사람들은 그제서야 편견과 생명 사이에서 갈등하게 된다. 이 변화를 ‘저들의 세계에서 벌어진 일’에 국한시키지 않는 것은 민기서라는 캐릭터에 의해서다. 그는 우리와 같은 현실에서 살다가 그 이상한 섬으로 들어간 인물이다. 시청자들이 의식적으로 그에게 기꺼이 빙의되는 것은, 그가 푸른도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하는 사람으로서 드라마 속의 시청자 역할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기서가 바보처럼 착한 삶을 무능력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 속에서 영신이란 진짜 바보를 만나며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시청자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겪는 변화의 과정과 일치한다. 따라서 봄이와 영신이가 그에게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민기서가 “그건 개떡같은 내 인생에 그 어떤 놈이 주고 간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전하는 진심어린 권유가 아닐 수 없다. 당신도 그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드라마는 민기서를 통해 얘기해주고 있다.

절대로 누군가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말할 것 같지 않던 민기서는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던 아버지의 도움으로 영신을 살리고 나서야 비로소 “고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깨어난 영신 앞에 선 석현(신성록)도 마찬가지. 심지어는 석현모까지 눈물 흘리게 하고, 결국 봄이로 하여금 그녀에게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는 “고맙습니다”를 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이 바보처럼 “고맙습니다”를 연발하며 살아가는 가족으로부터 점차 전염되어 가는 희망의 징후들을 기적처럼 포착해준다. 그러니 ‘고맙습니다’는 지금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지 못하고 있는 당신과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반어법이다. 그 반어법 앞에서 자신의 삶이 부끄러웠다면 그것은 당신도 아마 기적이라는 전염병에 막 감염되었다는 반가운 신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