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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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배', 순대장 발견케 한 나PD의 악역

D.H.Jung 2014. 3. 9.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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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할배>, 나영석 PD 악역을 자처한 까닭

 

이번 여행에서 나영석 PD는 왜 악역을 자처했을까. <꽃보다 할배> 스페인 편에서 나영석 PD는 어딘지 달라 보인다. 할배들의 용돈을 감축(?)하기 위해 협상을 시도하기도 하고 그러다 할배들의 파업선언에 꼬리를 내렸다가 결국은 착한 리더이순재에게 그 돈을 슬쩍 떠넘기고는 거짓 계약서에 사인까지 받아낸다. 또 굳이 짐꾼 이서진에게 드라마 촬영 핑계를 대게 만들고는 하루 늦게 합류하게 함으로써 할배들끼리의 첫 바로셀로나 숙소 입성까지의 고행을 하게 만든다. 나영석 PD는 왜 보다 적극적인 개입을 하게 되었을까. 그것도 악역을.

 

'꽃보다 할배(사진출처:tvN)'

사실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은 시작하기 전까지 어딘지 단물이 빠진 듯한 느낌을 줬던 게 사실이다. 할배들의 파리와 대만 여행은 물론 대단히 참신했다. 지금껏 그런 예능도 그런 시도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도대체 누가 팔순의 어르신들이 배낭여행을 하며 청춘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질 줄 알았으랴. 또한 이서진이라는 놀라운 짐꾼의 탄생을 예상했으랴. 그 첫 시도와 느낌이 가진 힘은 대단했다. 심지어 실버 파워가 문화의 새 트렌드로 등장했을까.

 

하지만 제 아무리 참신한 것도 세 번 정도 반복하면 기대감이 줄어드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니 무언가 다른 게 필요했을 게다. 사람이란 누구나 그러하듯이 한 번 같이 여행을 다녀오면 같은 팀이 다른 공간을 간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의 역할이 비슷비슷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새로운 발견이 예능의 포인트가 되는 나영석 PD로서는 그 역할을 조금 바꿔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나영석 PD의 의도적인 악역은 새로운 여행 이야기를 위해 취해진 연출자로서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셈이다.

 

일단 이 선택은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첫 회에서 단박에 눈에 들어온 것은 순대장이순재의 재발견이다. 용돈이 준다는 것에 모두가 거세게 반발할 때 사람 좋은 웃음을 보내고, 나영석 PD의 계략을 다 알면서도 짐짓 받아주며, 리더로서 동생들을 무사히 바로셀로나의 숙소까지 안내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다들 음식을 즐길 때도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스페인어와 지도에 몰두하는 순대장. 그는 나이 먹었다고 앉아있기보다는 나이 자체를 잊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실버 세대상을 보여주었다.

 

혹자는 나영석 PD의 함정(?)이 너무 짓궂다 여길 수도 있을 게다. 하지만 실상 나영석 PD는 지금껏 프로그램을 하면서 늘 이런 변화를 스스로 주도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12> 때도 그는 출연자들과 대립상황을 주도하며 밀당을 해왔고, <꽃보다 할배>를 하면서도 늘 이서진 옆에서 깐족대는 모습으로 그를 도발해왔다. 어찌 보면 상대방을 곤경에 빠뜨리는 걸 즐기는 악취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건 그 결과다.

 

나영석 PD가 악역을 맡으면서 사실은 그 상대방들이 돋보이는 캐릭터의 재발견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12> 때는 그래서 강호동을 비롯한 멤버들이 전부 돋보였고, <꽃보다 할배>에서는 이서진이 돋보였으며, <꽃보다 누나>에서는 이승기가 돋보였다. 이 결과는 나영석 PD의 악역이 자극을 위한 자극이 아니라, 그 상황을 통해 드러나는 인물의 새로운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이었다는 걸 말해준다.

 

사람은 위기의 순간을 만나야 그 진면목이 발견되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촌놈 같은 수더분한 얼굴로 다가와 출연자들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하는 나영석 PD는 이제 그 역할이 PD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고 여겨진다. 나영석 PD는 이제 프로그램 바깥에서 진두지휘하던 연출자만이 아니라 프로그램 안으로 들어와 적극적으로 상황을 만들어가는 출연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이것은 PD의 새로운 역할이다. 그저 미션 제시하기 위해 발 하나 담그고 있는 수준이 아니고 아예 여행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그리고 이것은 <꽃보다 할배>의 여행이 한걸음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찍기만 하는 그런 여행과는 사뭇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순대장을 발견케 한 나영석 PD. PD 역할의 진화가 점점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