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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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찌질한 박혁권의 분노와 그에 대한 동정

D.H.Jung 2014. 4. 17.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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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회>, 연애도 사업으로 만들어내는 시스템의 놀라움

 

첫 연주를 마치고 CCTV 사각지대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다 자칫 무대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혜인(김희애)과 선재(유아인). 그리고 그 이상한 낌새를 따라 무대 위까지 올라온 혜인의 남편 강준형(박혁권). 그는 거기 어딘가에 분명 혜인과 선재가 밀회를 즐기고 있을 거라는 걸 감지하지만 쉽게 다가가지도 또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못한다.

 

'밀회(사진출처:JTBC)'

아내인 혜인과 제자인 선재가 보통 이상의 관계라는 걸 이미 눈치 챈 그지만 화를 내기보다는 한 발 물러선 게 그가 한 일이다. 그는 아내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애가 더 큰 남자다. 교수로서 번듯한 제자를 하나 키워내는 일이 자신의 그 어떤 것보다 큰 공적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사실은 아내의 탈선이 자신에게 고통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제자를 키워내는 행복보다는 약하다고 여긴다.

 

혜인과 선재의 심상찮은 케미스트리를 감지한 이사장 한성숙(심혜진)이 학장 민용기(김창완)에게 전화해 아예 두 사람을 엮어놓는 게 어떠냐고 묻고 민용기도 여기에 가담하는 에피소드는 의미심장하다. 민용기는 또 강준형을 불러 혜인이 선재를 전담하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누가 시킨 것인가 하고 의심하는 강준형에게 민용기는 혜인의 젊었을 시절 스타일과 선재가 잘 어울린다며 적임자라고 강조한다.

 

강준형 역시 이를 허용하는 과정은 남녀 간의 연애관계, 아니 나아가 불륜이라고 해도 그것이 사업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면 남편조차 허용하는 시스템의 견고함을 보여준다. 강준형은 그저 바보이고 쪼다이며 시쳇말로 찌질이처럼 보인다. 그는 선재를 내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아내에게 화를 내지도 못한다. 또 이 모든 시스템이 결국은 사업적 성공으로 이용되며 두 사람의 불륜을 지원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어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한다.

 

그는 시스템이 그를 위해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이 돈의 흐름을 위해서만 굴러간다는 걸 모르는 바보다. 아내를 허용해 제자를 얻을 것 같았지만, 그래서 사랑은 잃어도 자기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상황은 그리 흘러가지 않는다. 진짜 사랑에 빠진 아내의 달라져가는 모습은 그를 비참하게 만든다. 왜 자신이 아니라 어린 청춘에게서 그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내의 밝은 미소와 웃음이 나오게 되었던가. 강준형의 고통은 이러한 끝없는 비교에서 비롯된다.

 

혜원이 우아한 노비라면 강준형은 그녀의 남편이 아닌 노비의 노비처럼 사는 인물이다. 그녀의 그늘 아래서 그녀가 노비 생활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교수직을 허영처럼 누리면서 제자 하나를 얻기 위해서 또 그녀를 내주면서. 그가 그녀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녀가 그를 쥐고 있는. 정확히 말하면 시스템에 의해 두 사람 모두가 쥐어져 있는. 집으로 돌아와 우아하게 위스키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여유란 사실 이런 굴종의 대가들로만 얻어지는 것들이다.

 

너 혜원이 찾는 대로 빨리 한남동 가라고 그래. 조사 들어왔대.’ 무대 위에서 혜원과 선재를 찾던 그에게 때마침 날라온 영우(김혜은)의 문자가 그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든다. 어떻게든 아내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지만 그렇게 드러내 놓는 순간 자신이 짐짓 모른 척 했던 아내의 불륜을 드러내놔야 한다. 무대에 선 그는 마치 햄릿처럼 고민한다. 찾느냐 마느냐. 그러다 그가 고작 선택한 것이 이렇게 어디에 대고 하는 지 모를 외침이다. “오혜원! 빨리 한남동 가! 검찰에서 나왔대! 당신 찾는대! 제발 가!”

 

그 목소리에는 분노와 동시에 더 이상 멀리 나가지 말라는 간절한 애원이 뒤섞여 있다. ‘제발이라는 말이 그 정조를 담아낸다. 물론 불특정한 관객에게 던지는 외침에 불과하지만 그 소리는 고스란히 밀회를 즐기던 오혜원의 귀에 닿는다. 화들짝 놀란 오혜원은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선재의 품을 벗어난다. 강준형은 무대 뒤쪽 어둠으로 사라진다.

 

마치 연극무대의 한 장면 같은 이 짧은 시퀀스 속에는 이 사회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고발을 담고 있는 이 드라마의 전체 구조가 들어가 있다. 피아노가 있고 장중한 음악이 깔리지만 그것은 이 비극적인 무대에 올려진 혜원과 선재 그리고 강준형이라는 세 인물이 처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사랑을 꿈꾸지만 사업으로 이용되는 불륜이 있고, 그런 허겁지겁 순간의 불륜조차 시스템의 부름에 의해 모두가 이끌려 간다.

 

놀라운 건 이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박혁권이라는 배우의 존재감이다. “대사가 박혁권의 입에만 들어갔다 나오면 파닥파닥 살아있는 생선이 된다. 놀랍도록 리얼한 연기를 보여준다.”고 극찬한 김희애의 말처럼 그의 연기는 독특하리만치 확실한 그만의 아우라를 담고 있다. <하얀거탑>에서 장준혁(김명민)과 같은 팀 닥터 역할로 등장했을 때부터 어딘지 남다른 느낌을 주던 그였다. <하얀거탑>에 이어 <아내의 자격>, <세계의 끝>, 그리고 <밀회>까지 안판석 감독의 사람이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박혁권에 의해서 이 찌질한 강준형이라는 인물을 동정적으로 들여다본다는 점은 중요하다. 그것은 단지 강준형을 벗어나 선재에게 간 혜원이라는 설정이 아니라 강준형도 혜원도 모두 시스템에 포획된 존재로서의 비극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그 공감이 바탕이 될 때 비로소 이 드라마를 단순 불륜극이 아닌 사회극으로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