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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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테랑', 무엇이 서민들을 분노하게 하는가

D.H.Jung 2015. 8. 9.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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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면 다 되는 세상, <베테랑>의 서민 판타지

 

영화는 영화다. 하지만 때로는 영화가 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지점들이 있다. 이를테면 <베테랑>에서 1인 시위를 하던 배 기사(정웅인)를 재벌3세가 사무실로 데려가 두들겨 패고는 마치 맷값이나 된다는 듯이 돈을 건네는 장면이다. 우리는 이 장면을 이미 어느 재벌가의 이른바 맷값 폭행 논란을 통해 들은 바 있다.

 


사진출처:영화 <베테랑>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위신을 지켜야 할 회장님이 아들 보좌 제대로 못한다고 상무 직함을 달고 있는 부하직원을 엎드리라고 한 후 매질을 하는 장면이다. 우리는 뉴스를 통해 술집에서 시비가 붙어 점원에게 아들이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한 굴지의 재벌 회장님이 보복폭행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바 있다.

 

<베테랑>은 영화다. 하지만 이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비상식적이어서 너무 영화적인 장면들은 우리에게 전혀 영화 같은 허구로만 다가오지는 않는다. 최근 몇 년 간 벌어진 이른바 재벌가의 각종 갑질 논란은 심지어 그 안에 조폭과 분간이 가지 않는 폭력의 양상까지 보여줬다는 점에서 서민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맷값이라는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듯이 돈이 있으면 누구든 팰 수 있다는 그 생각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폭과 유사하지만, 그것이 주먹 vs 주먹도 아닌 vs 주먹이라는 점에서 서민들을 더욱 치 떨리게 만든다.

 

<베테랑>이 포착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사람을 개 패듯 패고는 마치 개에게 먹이 던져주듯 돈을 던지고, 돈을 뿌려 공권력을 움직이고 언론을 장악하고, 심지어 돈과 자리를 매개로 부하 직원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빠져나가려는 비뚤어진 갑의 의식. 도무지 이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는 붙잡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들을 영화에서나마 시원하게 두들겨보자는 것.

 

류승완 감독의 액션은 정평이 나 있는 일이지만, <베테랑>의 액션이 특히 폭발력을 만드는 건 이러한 갑질 사회 속에 늘 당하는 입장에만 서 있는 대다수 을들의 정서를 이 영화가 제대로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다. “돈이 없지 가오가 없어?”라고 말하는 서도철(황정민)이나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돈을 채워 보낸 명품 백을 쏟아 부으며 거부하는 그의 아내 주연(진경)쪽팔리게 살진 않으려 한다는 일침은 그래서 답답했던 서민들의 마음을 뻥 뚫어주는 속 시원함을 선사한다.

 

그래서 영화는 액션보다 이런 갑질 하는 현실 앞에서도 당당하게 맞서는 인물들의 면면으로 인해 더 유쾌해진다. 윗선 눈치 보면서도 부하직원을 끔찍이 챙기는 오팀장(오달수)이 회사원들의 팀장 판타지를 충족시켜준다면, 홍일점인 미스봉(장윤주)은 약자로서의 위치에 서곤 하는 여성들의 판타지다. 이들의 액션은 그래서 단순히 나쁜 놈 멋지게 때려잡는 카타르시스에 머물지 않는다. 발길질 하나만 날려도 그 서민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다는 정서적 공감 때문에 그 액션의 카타르시스는 더욱 커진다.

 

하지만 역시 영화는 영화다. <베테랑>은 그 영화 같은 현실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전혀 현실같지 않은 판타지로 죄지은 놈은 재벌이라도 벌을 받는다는 걸 보여주지만, 과연 진짜 현실도 그럴까. 비록 실제 주먹은 아니라고 해도 잔뜩 혹사시켜놓고 돈 몇 푼 쥐어주는 것이 노동현장에서는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돈이면 사람도 팰 수 있다는 이 황당한 현실 앞에 서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다. <베테랑>에 대한 열광은 그 분노를 판타지로 풀어냈기에 가능한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