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개늑시’, 한국형 액션 스릴러의 새 장을 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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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늑시’, 한국형 액션 스릴러의 새 장을 열다

D.H.Jung 2007. 8. 17.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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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 복수극을 넘어서는 ‘개늑시’의 힘

MBC 수목드라마 ‘개와 늑대의 시간’이 다루고 있는 것은, 기억이란 부서지기 쉬운 장치에 기대 살아가는 가녀린 인간이 겪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만일 ‘기억’이란 부분이 없었다면 이 드라마는 그저 부모를 죽인 원수를 찾아 복수하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홍콩 액션 영화의 답습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듯 이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단순한 복수극과 액션에만 있지 않다.

드라마가 주시하고 있는 것은 주먹을 날리고, 칼을 휘두르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액션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취하는 캐릭터가 가진 내면의 갈등이다. 자신이 싸우고 있는 것이 도대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그 상황 속에서 끝없는 갈등에 휩싸이게 되는 인물들이 가진 어쩔 수 없는 자가당착 같은 것이 드라마를 관통하는 진짜 재미이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청방이란 조직 속에 언더커버로 잠입해 있다가 기억상실이 되어버린 이수현(이준기)이다.

드라마는 이수현의 변화과정을 고스란히 따라감으로써 그가 겪을 심적 고통을 예지하게 만든다. 기억이 사라진 상황 속에서 K로 한 행동들은 후에 다시 돌아올 기억 속에서는 악몽이 될 것이 분명하다. 먼저 친아버지처럼 자신을 길러준 강중호(이기영)의 죽음 앞에 무심했다는 것, 그로 인해 친구처럼 형제처럼 지내던 강민기(정경호)와 철천지 원수가 되었다는 것, 그로 인해 자신이 사랑했던 서지우(남상미) 앞에 설 수 없다는 것들이 부메랑처럼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무엇보다 원수 밑에서 충복생활을 하면서, 오히려 자신을 길러주고 돌봐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 자기 자신을 이기기가 어려울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수현이란 인물이 기억이란 터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렇게 야누스적인 변신을 하는 과정 속에서 주변인물들 역시 모두 ‘개와 늑대의 시간’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이수현이 적인지 아군인지를 알 수 없는 상황 속에 빠지는 것이다. 강민기는 그와의 극한 대결 구도 속에서 그 상황을 가장 치열하게 드러낼 캐릭터다. 국정원 요원들의 상황은 대체로 강민기의 심적 갈등 상황을 고스란히 따라가게 된다.

이수현과 강민기 사이에 끼어 있는 서지우란 캐릭터는 이 상황을 더 복잡한 미궁 속에 빠뜨린다. 서지우는 마치 자기의 친아버지인 마오(최재성)와의 기억을 지워버리듯 살아왔지만 절대로 지워질 수 없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즉 서지우 역시 이수현이 겪는 기억상실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 상황 속에 있는 것. 그녀는 있는 사실을 없는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점에서 능동적인 기억상실 속에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강민기나 이수현 둘 다 서지우의 친아버지인 마오와 섞일 수 없는 원수 사이라는 점은, 그녀로 인해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게 되는 이수현과 강민기의 갈등 상황을 예견케 한다.

이처럼 복잡한 인물의 갈등관계 속에서 액션을 끄집어내는 ‘개와 늑대의 시간’은 드라마에서는 전혀 시도되지 않았던 액션 스릴러의 한 장을 열고 있다. 미드 ‘24’에서 잭 바우어가 세상에서 가장 길게 보낸 하루 동안 끝없이 반복되는 갈등과 선택의 상황을 보여줘 액션 스릴러의 강한 중독성의 세계 속으로 이끌었듯이, ‘개와 늑대의 시간’ 역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빠진 인물들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24’는 오리무중의 상황 속에 빠진 잭 바우어에 직접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되어 똑같은 갈등 상황을 경험하는 짜릿함을 주는 반면, ‘개와 늑대의 시간’은 이수현이 처한 그 상황 자체를 관조적으로 이해하면서 후에 벌어질 파고를 예상하는 재미를 준다는 점이다. 이렇게 복잡한 미스테리적인 요소를 피하고, 상황 자체를 드러냄으로써 드라마의 구조는 좀더 쉽게 따라갈 수 있는 형태를 가지며, 동시에 캐릭터들의 변화되는 감정선이 극대화된다는 장점을 가진다. 이러한 감정선을 따라가는 한국형(?) 액션 스릴러의 시도는 우리네 시청자들의 눈높이에 맞아떨어진 점이 분명히 있다.

무엇보다 이 흥미진진함을 엮어내는 힘은 ‘태극기 휘날리며’, ‘야수’의 한지훈 작가와 유용재라는 신인작가의 탄탄한 스토리텔링에서 나온다. 여기에 혼신을 불태우는 연기를 보여주는 연기자들은 스토리 속 캐릭터의 결을 제대로 살려내고 있다. 이 드라마는 거의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야누스적인 감정 선의 급격한 변화를 그려내야 하는 난점을 갖고 있지만, 성지루, 김갑수, 이기영, 최재성 같은 중견배우들이 무게 있는 존재감으로 안정감을 살리면서 그 위에 이준기를 비롯한 정경호, 남상미의 광적인 연기가 덧붙여지면서 폭발력을 얻고 있다.

제목에 걸맞는 갈등과 대결구도로 가고 있는 ‘개와 늑대의 시간’. 드라마 속 캐릭터들은 각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이 개인지 늑대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만 하는 갈등의 시간을 맞고 있다. 그 속에서 허우적대는 군상들을 보면서 깊은 공감대를 느끼는 것은, 우리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한 생을 살아가는 시간 역시 저들이 겪는 오리무중의 상황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이라는 가녀린 힘에 덧대 살아가는, 그래서 기억, 추억, 시간 같은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것들이 한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간이라는 상황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