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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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페이크 다큐, 그 진실과 거짓 사이

D.H.Jung 2007. 9. 17. 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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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크 다큐와 다큐 드라마, 같은 듯 다른 길

올 초 느닷없는 성추행 동영상에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경찰들은 ‘성추행범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틀 후, 이 퍼포먼스(?)는 고교생들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발칙한 고교생들이 덧붙인 말이다. “우리의 동영상을 검증이나 여과 없이 방영한 방송 등 미디어의 행태 등에 비춰 UCC 동영상의 정치·상업적 악용 가능성에 주목해달라”고 했던 것. 물론 동영상이 극장이나 TV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틀로서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실을 오도하는 부적절함을 남긴 것이 분명하지만, 그 목적으로만 보면 진정한 ‘페이크 다큐’의 한 면모를 보인 것은 틀림없다.

페이크 다큐, 사기와 작품 사이
최근 케이블 TV를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페이크 다큐는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처럼 ‘장르 패러디’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진실성을 꼬집으면서 동시에 그 장면 속에 잡히는 진실처럼 보이는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은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미디어들의 선정성을 끄집어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영상이 어떠한 허구적 장치를 담보할 수 있는 틀이 없었다는 데서, 작품이 아닌 사기가 되었던 것이다. 1999년 인터넷을 발칵 뒤집히게 한 ‘블레이 위치’나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받은 페이크 다큐, ‘대통령의 죽음’은 영화라는 틀로 소비될 수 있었기에 사기가 아닌 작품이 되었다.

즉 페이크 다큐가 가진 전략적 의미는 다큐보다는 그 다큐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영화라는 허구에 더 방점이 찍힌다. 이들 영화의 틀을 가진 페이크 다큐가 보여주는 영화적인 의미는 허구를 현실처럼 믿는 대중들에게 그것은 본래 허구였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즉 허구를 깨기 위해 다큐라는 무기를 쓰는 것이다.

환타지를 제공하는 가짜들
그렇다면 최근 케이블 TV에서 들고 나온 프로그램들을 ‘페이크 다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짜 다큐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그 그릇으로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취하고 있다. 즉 이들 프로그램들이 파괴하고 있는 것은 허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뉴스 프로그램 속에 선정적인 거짓장면을 넣은 후에(이것은 고교생들의 성추행 동영상을 통해 실제로 벌어졌다) 사실은 페이크 다큐였다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본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갖는 신뢰성을 무너뜨려 가면서 이들 프로그램이 얻어내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현실에서라면 보기가 쉽지 않은 자극적인 장면들을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페이크 다큐가 가진 환타지 파괴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 즉 환타지 제공의 목적을 갖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 프로그램 속에 ‘실제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진이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라는 자막 고지가 나온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자극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성에 있는 게 아니고 환타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포지셔닝 이론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의 환타지를 깨는 다큐 드라마
즉 페이크 다큐는 허구라는 그릇 속에 들어가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것이 아닌 페이크 다큐(?)는 TV가 가진 신뢰성을 저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제살 파먹기와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을 끄는 것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표방하면서 만들어진 ‘막돼먹은 영애씨’다. ‘다큐’라는 진실성을 담보하는 단어에 ‘페이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붙여 ‘페이크 다큐’가 탄생했듯이, ‘다큐 드라마’는 ‘다큐’라는 현실성에 정반대축에 있는 ‘드라마’라는 환타지가 붙어 탄생했다. 목적은 페이크 다큐와 같다. 드라마가 가진 환타지를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깨겠다는 의도다.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목 역시 다큐 드라마처럼 상반된 두 의미를 갖고 있다. ‘막돼먹은’이란 단어에 연기자 이영애가 붙은 것이다. 드라마는 영애씨(김현숙)의 음성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보여주며 다큐의 한 틀로 시작하지만 곧 드라마 형식으로 전환된다. 즉 ‘막돼먹은 영애씨’는 다큐가 아닌 드라마라는 걸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다큐적인 속성들을 활용해 트렌디한 드라마들의 환타지를 깬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사랑은 저 트렌디 드라마의 해피엔딩과는 상반되게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큐를 활용해 드라마의 허구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막돼먹은 영애씨’는 그 목적에 있어서 진짜 페이크 다큐의 장르적 미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케이블 TV들이 ‘페이크 다큐’라 부르는 프로그램들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지만 거짓이고,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허구를 표방하지만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환타지를 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후자는 환타지를 부순다. 똑같이 다큐를 표방하고 있어도 양자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은 이처럼 목적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케이블 TV의 ‘페이크 다큐’라 불리는 프로그램들에 어느 정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그 목적이 자극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