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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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사극, 사랑에 빠지다

D.H.Jung 2007. 9. 18. 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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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이어 또다시 사극전성시대가 열렸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시청률 수위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KBS의 ‘대조영’을 위시해, 새롭게 돌풍으로 일으키고 있는 SBS의 ‘왕과 나’, 그리고 MBC의 ‘이산 정조’와 ‘태왕사신기’가 나란히 배치됨으로써 금요일을 뺀 일주일 내내 사극이 방영되게 됐다. 그런데 최근 방영을 시작한 사극 세 편이 모두 그 중심에 사랑을 주테마로 다루고 있어 눈길을 끈다.

‘왕과 나’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스스로 거세한 김처선(오만석)이란 내시의 이야기다. ‘사랑을 위해 거세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자체가 극적인 이 이야기는 절대권력을 가진 왕, 성종(고주원)과 후궁이었던 폐비 윤씨(구혜선), 그리고 내시인 처선의 운명적인 사랑을 다룬다. ‘태왕사신기’는 이야기의 모티브 자체를 사랑과 질투에서부터 따왔다. 단군신화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등장한 환웅을 사이에 둔 호족의 가진과 웅족의 새오 간의 사랑과 질투는 다시 광개토대왕 시기의 담덕(배용준)을 사이에 둔 기하(문소리)와 수지니(이지아)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산 정조’ 역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정조(이서진)와 성송연(한지민)의 사랑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처럼 사극 속에 등장하는 멜로 코드는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의 특징은 사랑을 그저 약방의 감초처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면에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것은 이들 사극이 보다 적극적으로 여성 시청층을 겨냥하겠다는 의도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운명적인 사랑을 다루는 전통적인 멜로드라마는 늘 수요층이 있게 마련인데, 최근 들어 현대극에서 멜로드라마가 퇴조하면서 여전히 남은 수요층을 사극이 끌어안는 형국이다.

또한 여기에는 사극의 달라진 시각도 한 몫을 차지한다. 과거의 사극에서는 주로 영웅으로서의 주인공을 사극에 담았다면, 지금의 시대가 요구하는 사극은 영웅보다는 한 인간(영웅이라도 인간적인 면모의 영웅)을 다룬다. ‘왕과 나’는 왕보다는 나의 이야기에 더 초점이 맞춰지고 따라서 나의 시선으로 보기 때문에 왕과 얽히는 멜로 드라마도 수평적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태왕사신기’는 영웅적인 인물의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이야기 속에 운명적인 멜로드라마를 넣어 극성의 강화와 함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낸다. ‘이산 정조’는 정조의 인간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데 있어서 성송연이란 운명적인 연인이 등장한다.

사극들이 저마다 사랑에 빠졌지만 각 사극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강점들은 제각각 다르다. ‘왕과 나’가 가진 멜로드라마의 강점은 시대적 아픔 속에 운명적으로 얽히는 관계 자체가 가장 큰 관전포인트가 된다. ‘태왕사신기’는 두말할 것 없는 배용준이라는 멜로드라마의 제왕이 있어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이산 정조’ 역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명대사로 기억되는 ‘다모’의 이서진과, ‘경성스캔들’에서 맑고 밝은 씩씩한 면모를 보여준 한지민이 엮어 가는 사랑이야기가 관전 포인트이다. 그 어느 것이든 기대를 갖게 만드는 이들 사극 속에서 한동안 침체기를 겪었던 운명적 멜로드라마가 날갯짓을 할지 귀추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