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왕은 탄생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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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은 탄생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뿐

D.H.Jung 2007. 10. 3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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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과 ‘왕과 나’가 왕을 그리는 방식

적어도 현재 방영되고 있는 사극에서라면 왕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산’의 이산(이서진)은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노론들과의 싸움에서 이겨야만 살아남아 왕이 될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이 싸움 속에서 할아버지 영조(이순재)가 하는 역할이다. 그는 사사로운 정에 휩쓸려 이산을 보호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이산을 그 위험 속에 던져 넣는다. 기댈 곳 없는 이산은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수밖에 없다.

반면 ‘왕과 나’에서는 그 양상이 다르다. 인수대비(전인화)의 치맛바람과 사실상의 권력을 쥐고 있는 정희왕후(양미경)의 수렴청정 속에서 성종(고주원)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기댈 곳 없는 왕실의 든든한 뒷배를 가지기 위해 인수대비는 한명회의 여식과 성종을 정략결혼을 시키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하나 할 수 없는 무력감을 느끼는 성종은 국사를 돌보기보다 여인들에 더 집착한다. 그는 무엇하나 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다.

이 두 사극이 그리고 있는 왕의 모습은 궁이 어떻게 묘사되고 있는가로 쉽게 비교된다. ‘이산’에서의 궁은 이산 자신을 끝없는 죽음의 위협 속에 몰아넣는 장소이며, 그 누구도 자신을 도와줄 사람 없는 곳이다. 하지만 도망칠 수도 없는 것이 궁으로부터의 도피는 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산이 할 수 있는 것은 궁 밖의 인물들(혹은 지체가 낮은 자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이산은 수시로 궁 밖 출입을 한다. 자신을 옭아매는 감옥 같은 공간인 궁을 벗어나는 이런 행위는 왕을 좀더 능동적인 캐릭터로 그려낸다.

하지만 ‘왕과 나’에서의 성종은 궁 밖으로 나갈 일이 없다. 인수대비와 정희왕후가 사실상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는 궁 안에서 안전을 보장받은 채 살아간다. 성종의 고민은 궁 밖에 두고 온 정인, 윤소화(구혜선)와의 혼인 약조를 지키지 못한 것이지만, 단 한 번 먼발치에서 보고 궁으로 돌아왔을 뿐 그렇다고 궁 밖을 수시로 왕래하지는 않는다. 그마저 윤소화가 궁 안으로 들어오자 왕은 궁 밖을 쳐다볼 이유조차 없어진다. 성종은 궁 안에서 보호받는 인물로 두 여인의 치마폭에 살아가는 수동적인 캐릭터로 그려진다.

이들의 지상과제는 모두 성군이 되는 것.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산이나 성종이 백성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궁 밖을 자주 나다니는 이산은 백성들과의 친밀도가 거의 친구 관계에 가깝게 그려진다. 박대수(이종수)에게 얻어맞고도 영원한 동무임을 말하는 이산은 늘 어렵고 핍박받는 백성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인물이다. 반면 성종은 궁 밖과의 교류가 거의 없다. 있다고 해봐야 그것은 궁 안으로 들어온 김처선(오만석)을 충신으로서 아끼는 정도이다. 이렇게 된 데는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이산과, 누구나 다 자신을 도와주는 성종이 자라온 환경의 차이에서 비롯한다.

물론 이것은 사극으로서 극화된 캐릭터일 뿐이며, 실제의 성종과 정조가 그런 모습이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하지만 사극의 캐릭터는 현대적인 시점에서 해석된 것이기에 그 모습이 반영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현재이다. 왕가의 핏줄을 이어받기만 하면 그저 왕으로 살아가는 그런 왕의 이미지는 이제 구세대의 유물이 되었다. 왕은 탄생하는 게 아니고 이처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것은 현대적으로 볼 때 정치적인 의미도 되고, 교육적인 의미도 된다. 정치적으로는 나라의 대표자를 만드는 것이 주변인물들과 국민들의 정치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고, 교육적으로는 인재를 만드는 것이 주변인물들이 가진 교육관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다. 어느 쪽의 방식을 선택할 지는 전적으로 우리에게 달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