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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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어덜키드와 키덜트, 소비되는 아이들

D.H.Jung 2007. 11. 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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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그룹, 아역스타의 인기, 그 이면

상큼하고 깜찍한 어린 소녀들이 언발란스하게 디스코 춤을 추면서 “텔 미~”를 연발한다. 이름하여 원더걸스. 누가 봐도 영락없는 아이들(idol)스타들이지만 좋아하는 팬층은 10대에 머물지 않는다. 20대 젊은이들부터 40대 아저씨들까지 다양하다는데 한 편에서는 이런 어른들의 소녀 취향(?)을 가지고 ‘로리타 콤플렉스’까지 나오는 모양이다. 하지만 특별한(?) 성적 취향을 가진 소수라면 모를까, 다수의 아저씨들이 원더걸스를 좋아하는 이유를 로리타 콤플렉스로 설명하려 드는 건 과장된 해석이라 생각된다.

헬로 키티와 원더걸스는 닮았다
이 소녀그룹에 대한 아저씨들의 열광은 오히려 캐릭터 비즈니스의 연장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연예 엔터테인먼트를 비즈니스적으로 접근할 때, 연예인들은 하나의 캐릭터 비즈니스의 일환으로서 소비된다. 드라마가 됐건, 영화가 됐건 컨텐츠에 등장하는 스타들은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새롭게 갈아입고 대중들에게 제시된다. 기존에 대중들에게 강력한 이미지로 각인된 스타는 새로운 컨텐츠에 대한 시장진입 리스크를 줄여준다. 대중문화 속 아이들(Idol)이란 마치 팬시한 상품을 대중들이 좋아하듯이 그 자체가 캐릭터 상품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최근의 소녀그룹은 하나의 새로운 캐릭터 트렌드라고 볼 수 있다. 그 캐릭터는 ‘청순→발랄→섹시→도전’을 거쳐 이제 ‘상큼 발랄’의 이미지로 변모했다. 소녀그룹의 연령대가 20대에서 10대로 내려온 것은 소비되는 이미지의 이런 변화로 설명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부분, 어린 아이돌스타라는 컨셉트의 상품이미지에서 언뜻 보이는 것이 있다. 그것은 키덜트(kidadult, kid와 adult의 합성어로 20, 30대이지만 여전히 어린 감성을 가진 어른) 문화상품의 이미지다. 어른들에게도 여전히 소비되는 미키 마우스나 헬로 키티 같은 문화상품.

이렇게 캐릭터 지향적인 소비가 반대로 보여주는 것은 음반시장의 퇴행이다. 과거의 가수라 함은 노래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는데 이제는 가수가 하나의 캐릭터 이미지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원더걸스의 ‘텔 미’는 특별한 가사의 내용이 없다. 그저 “네가 날 사랑할 줄은 몰랐다. 그게 너무 좋다. 그러니 자꾸만 말해 달라.” 그런 내용의 반복이다. 가사에 걸맞게 음률도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이것은 디스코 같은 복고를 지향한 뮤비 컨셉트와 캐릭터 컨셉과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다분히 기획된 것이다. 구닥다리의 느낌에 쉽고 친숙한 노래는 오히려 캐릭터 컨셉트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준다.

솔직한 미숙함이 가진 리얼리티라는 파괴력
캐릭터 컨셉트를 키덜트 문화상품으로 포장한 것은 ‘원더걸스’라는 이름과 뮤직비디오에 등장하는 (조금은 어색한) 원더우먼 캐릭터에서도 드러난다. 복고적이며 다분히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캐릭터 이미지를 차용하자 원더걸스는 이제 단순히 10대 아이들 스타가 아니라 30, 40대에게도 소비될 수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처럼 젊은 연령대와 나이든 연령대의 양자를 소비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은 키덜트 문화상품 마케팅의 장점이다. 이것은 여러 세대가 동시에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어떤 소통의 창구로서 긍정적인 면이 있지만 한편에서는 지나친 상품화의 결과로 보기도 한다.

이밖에도 원더걸스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컨셉트는 ‘미숙함을 그대로 드러내는 솔직한 리얼리티’라는 점이다. 음반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아이들 스타들의 문제는 리얼리티가 떨어진다는 데 있다. 이 말은 너무 상품화된 캐릭터로 보여지기 때문에 구매에 있어서 때론 거부감이 느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좀더 날것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솔직함으로 제시되고, 현재의 모든 대중문화상품의 기본 컨셉트가 되는 리얼리티를 담보한다. 이렇게 되면 캐릭터에 대한 매력이 있는 한, 노래가 어설프든, 춤이 어설프든 그것은 또 다른 매력으로 전환된다. 호감가는 솔직한 미숙함은 때론 앞으로의 성장가능성까지 기대하게 만든다.

키덜트 문화가 양산하는 어덜키드
키덜트 문화가 장난감이나 완구시장 같은 전통적인 캐릭터 시장에서 이제는 대중문화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또 한편으로는 어덜키드(애 어른)의 양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것은 대중문화 속의 캐릭터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키덜트 문화가 요구하는 것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소년이 되기 때문이다. 최근 사극 속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아역스타들을 보면 어덜키드 문화의 탄생을 예감케 된다.

어린 제왕의 카리스마를 보여준 유승호, 비련의 여주인공 윤소화를 연기한 박보영, 성인 못잖은 멜로 연기를 펼친 어린 김처선 역의 주민수, 여기에 성인 악역 못잖은 섬뜩함을 연기한 어린 정한수 역의 백승도, 놀라운 감정연기를 보여준 이산 역의 박지빈 등등의 아역스타들에게 대중들이 놀라는 것은 그 ‘성인 못잖은’ 연기력이다. 이 사극들의 어린 연기자들만 모아놓고 보면 성인 사극의 아이 버전을 보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키덜트 문화의 대중문화 침투는 이제 소년, 소녀들이 문화상품의 첨병으로 소비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국민여동생이란 미명 하에 어린 캐릭터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문근영이 ‘댄서의 순정’이라는 복고적인 느낌의 영화 속에 등장했을 때 이미 예기되었던 것들이다. 문화상품이란 유행을 타는 것이기에 그걸 가지고 뭐라 하긴 그렇지만, 우려되는 것은 자칫 키덜트 문화가 가져올 수많은 어덜키드가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하나의 바람직한 전범으로 제시되지는 않을까 하는 점이다. 아이는 그래도 아이다워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