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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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명랑TV

‘지피지기’가 보여준 아나운서의 속살

D.H.Jung 2007. 11. 6. 2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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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테이너 전성시대, 달라지는 TV의 입

‘라디오·텔레비전방송국에 속하여 뉴스 등을 고지 전달하는 것을 주임무로 하는 사람 또는 그 직업.’ 아나운서의 사전적인 정의다. 하지만 이제 여기에 몇 가지를 더 추가시켜야 할 것 같다.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장기를 보이거나 시청자들에게 웃음까지 전해주는 사람’이 그것이다. 이른바 아나운서가 엔터테이너가 되어 가는 아나테이너 전성시대. 아나운서들이 달라지면서 TV의 입도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지피지기, 아나운서의 리얼리티쇼
새로운 포맷으로 시작한 ‘지피지기’는 현재 달라지고 있는 아나운서들의 양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 자리에 출연한 서현진, 최현정, 문지애, 손정은 네 명의 아나운서들은 4인4색의 짧은 치마를 차려입고 반듯한 얼굴보다는 늘씬한 다리를 뽐냈다. 뉴스를 할 때는 전혀 표정변화를 보이지 않던 이들은 화면 속에서 활짝 웃었고, 담담한 톤으로만 얘기하던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심지어는 과거라면 아나운서실에 끌려가 혹독한 질책을 들을 일인 섹시 컨셉의 화보촬영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자리배치가 갖는 묘한 긴장감이다. MC가 총 일곱 명이나 되는 이 프로그램에서 메인 MC 자리를 꿰차고 앉은 건 박명수. 그는 스스로도 자기가 앉아있는 곳이 편안하지 않은 듯, 보조자리인 정형돈 옆에 앉으며 “여기 오니까 마음이 다 놓이네”하고 말했다. 아나운서 넷이 다닥다닥 앉은 자리는 그들이 예능인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도 여전히 무게감이 있었다. 긴장감 넘치는 자리배치는 말 그대로 개그맨과 아나운서의 자리가 역전된 작금의 상황을 그대로 재연해냈다.

프로그램은 이들 아나운서들의 속살을 보여주는 리얼리티쇼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MC들의 멘트 속에는 뉴스로 대변되는 아나운서들의 이미지를 깨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아나운서라 그런지 노래를 해도 표정에는 변화가 없으시네요.” “(노래를 해도) 표정은 뉴스야.” 프로그램은 뉴스 속에서 경직된 모습으로 보이던 ‘아나운서의 얼굴’과 그 밖으로 나와 보이고 있는 ‘맨 얼굴’ 사이의 묘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거기서 웃음을 끄집어냈다.

‘예능프로에 가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의 순위를 뽑는 코너에서도 여전히 이 긴장과 이완을 통한 웃음을 의도한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망가져요.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마세요.”, “지나치게 이미지가 신뢰감이 있어서 예능엔 어울리지 않는다” 같은 얘기들을 해주는 PD들이 등장한다. 이것은 아나운서가 왜 예능프로그램에 나와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정확하게 표현해준다. 아나운서가 가진 신뢰감을 예능의 오락기능 속에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시청률 앞에 아나운서도 변해야 산다
이러한 아나운서들의 연예인화는 TV 자체의 용도가 급격하게 오락기능 속으로 기울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실제로 TV가 가진 보도기능은 급격한 하락을 거듭하고 있다. KBS 9시 뉴스를 빼고는 MBC, SBS의 뉴스 프로그램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 그것은 속보성에서 인터넷을 따라오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 TV가 보내는 뉴스 자체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것은 포털 등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연성화된 뉴스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뉴스 역시 오래 전부터 앵커라는 스타시스템을 활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더 이상 신뢰성에 기반한 스타시스템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제 뉴스도 오락화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이 상황 속에서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등장한다. 하나는 시청률 지상주의 속에서 아나운서의 새로운 역할모델을 찾아내려는 방송사와, 방송의 신뢰성과 보도라는 책무에 기반한 아나운서실의 입장이다. 결과는 예정됐던 대로다. 한때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아나운서실들도 이번 가을 개편을 기점으로 태도를 바꾸고 있다. 아나운서들의 변화를 수용하겠다는 자세다. ‘지피지기’가 보여준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는 이런 변화된 상황 속에서 가능해진 일이다.

‘상상플러스’를 통해 보여준 노현정의 성공은 아나운서의 새로운 역할 모델로서 가능성을 제시했다. 아나운서의 신뢰성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것으로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방송사에게도 이득이 되는 일이었고, 점점 입지가 묘연해지는 아나운서들에게는 새로운 활로가 되는 길이었다. 방송사 입자에서는 거의 몇 명의 MC가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을 잠식하는 상황 속에서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된 MC들을 아나운서라는 새로운 얼굴로 교체한다는 의미도 있다. 게다가 이들은 방송사 소속이기에 비용도 적게든다.

‘지피지기’가 가져올 파장
하지만 이것이 진정 방송사에 장기적으로도 이득이 될 지는 모르는 일이다. 아나운서들의 연예인화는 아나운서들의 방송사 탈출을 가속화시킬 것으로 보인다. 스타가 된 아나운서들이 굳이 봉급쟁이로서 방송사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속속 방송사를 빠져나오는 아나운서들에게 방송사가 좋지 않은 심사를 드러내는 건 그 때문이다. 이것으로 연예인처럼 아나운서들 역시 급격히 ‘소비’될 것이 자명하며, 한편 방송사의 보도기능 역시 아나운서들의 연예인화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어찌 보면 아나운서들의 이런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요청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 건, 우리에게 신뢰 있는 정보를 전하던 입이, 말재주와 입담으로 기능해야 살아남는 현실 때문이다. 특히 여성들의 지성적 모델로서 제시되던 여성 아나운서들조차 섹시컨셉의 상품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이 자칫 여성에 대한 방송의 왜곡된 이미지를 보는 것 같아 자못 안타깝기 때문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 백승이라는 의미의 ‘지피지기’는 과연 자신들의 시도가 TV라는 매체에 어떤 변화를 몰고 올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네 명의 아나운서가 벌써부터 보이쉬한 캐릭터, 우아한 캐릭터, 귀여운 캐릭터, 도발적인 캐릭터로 구성된 하나의 아이들(Idol) 그룹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이것은 혹시 방송사의 새로운 아나운서 스타시스템 전략의 하나일까. 모를 일이지만 이미 아나운서의 속살을 본 지금, 분명 이 흐름을 돌리기엔 이미 너무 멀리 온 느낌이라는 것이다. 실로 아나테이너 전성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