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역사의 갑옷 벗은 사극, 장르와 몸을 섞다 본문

옛글들/명랑TV

역사의 갑옷 벗은 사극, 장르와 몸을 섞다

D.H.Jung 2007. 11. 21. 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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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물에서 메디컬 에로까지 장르사극의 세계

과거 사극이라면 역사적 사료를 먼저 떠올렸다. 하지만 이제 사극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과거로서의 역사적 시점이다. 어느 순간부터 역사라는 무거운 갑옷을 벗어 던진 사극은 점점 상상력을 키워왔고 이제 장르와 몸을 섞기 시작했다. 그 대상은 이제 환타지(태왕사신기)에서부터 수사물(별순검), 미스터리(정조암살미스터리 8일), 메디컬 에로(메디컬 기방 영화관)까지 다양해졌다.

환타지 사극을 주창한 ‘태왕사신기’는 저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실존인물을 환타지라는 장르 속으로 끌어들이는 모험을 감행했다. 쥬신의 운명을 타고난 태왕 담덕(배용준)이 사신(네 신물, 네 부족)을 취하는 과정을 그린 이 사극은 환타지라는 장르를 활용하고 있기에 그 자체를 리얼리티로 볼 수 없는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실제 역사적 인물은 환타지라는 장르 속에서 하나의 상징이나 메타포로서 그려진다. 이것은 마치 한 실제 인물을 하나의 신화로서 그려내는 것과 같다. 이 모험이 광개토대왕이라는 역사적 인물에 어떤 영향을 줄 지는 알 수 없으나 드라마라는 허구의 장르가 이런 과감한 시도를 했다는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바라볼 만 하다.

케이블 시청률의 마의 벽을 연일 깨고 있는 조선시대 버전 CSI인 ‘별순검’은 국내에서는 현대물에서조차도 시도되지 않은 ‘과학수사’를 기치로 내세운 수사물이다. 국내의 수사물들이 ‘현장수사’라는 발로 뛰는 액션에 주로 머물러 있었다면 ‘별순검’은 조선시대의 ‘중수무원록’이라는 과학적인 법의학의 잣대를 내세워 본격적인 수사물의 장르를 세우고 있다. CSI가 버젓이 버티고 있는 현대물에서 경쟁력을 가지기 어려운 법의학이란 장르가 조선시대의 특수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자 우리 드라마만의 독특한 소재가 된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무게를 벗어 던진 사극은 그 시점만 옮겨놓아도 장르물 자체를 새롭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은 영화 ‘영원한 제국’으로 일찍이 조선시대판 ‘장미의 이름’을 축조해냈던 박종원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스텝들조차 영화인들로 구성된 이 작품은 명실상부한 무비드라마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미스터리 사극이 될 것이다.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암살시도라든가, 원행에서 벌어지는 갖은 음모들은 정약용이라는 인물의 추리와 맞물려 보는 이들의 손에 땀을 쥐게 한다. 실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분분한 설들이 미스터리를 증폭시키는 기폭제가 되는 이 사극은 역시 조선시대라는 배경이 주는 독특함이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된다.

‘메디컬 기방 영화관’에 이르면 이제 사극의 장르와의 만남은 무한히 증폭될 수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성과 의학을 접목시킨 이 사극은 그 안에 모든 장르들이 가진 코드들을 내포하고 있다. 에로물의 성격에다가 액션이 가미되고 거기에 메디컬 장르가 섞이면서 만들어지는 이 드라마는 그 각각으로 봤을 때 진부해질 수 있는 소재들이 그 그릇이 되는 사극이란 틀 속으로 오자 참신해진다.

사극의 장르화는 이미 영화에서 시도되었다. ‘음란서생’, ‘혈의 누’, ‘황산벌’ 같은 사극영화들은 이미 장르화된 현대물의 사극 버전이라 할만하다. 하지만 진정한 사극의 전성시대는 드라마 사극과 장르가 맞닿는 부분에서 생겨나고 있다. 공중파에서 정통사극의 틀을 벗어 퓨전 사극이 새로운 사극 중흥의 불씨를 마련했다면, 케이블TV의 공격적인 자체방송 제작은 여기에 기름을 부은 격이다. 공중파에서는 시도하기 어려운 과감한 표현들이 가능해지면서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자, 영화인들의 드라마 제작이 무비 드라마라는 형태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 기류 속에서 드라마로서는 가장 블록버스터가 될 수 있는 사극이 체계화되면서 장르화도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그 끝을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르 사극의 가능성은 무한히 열려 있는 게 사실이다. 현대물로서 성공했던 장르 드라마들은 고스란히 사극으로의 변용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로써 사극은 이제 명실상부하게 현대물의 대척점에 설 수 있는 다양성을 확보하게 됐다. 장르란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공의 시스템으로서 제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도 한동안 사극전성시대는 지속될 것이 분명해졌다. 장르와 기왕에 몸을 섞은 사극이 다양한 얼굴과 개성을 가진 자손들을 퍼뜨리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