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바보’, 착한 서민의 자화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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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착한 서민의 자화상

D.H.Jung 2008. 3. 4.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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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머니는 동생마저 맡기고 떠나지만 정작 승룡이는 웃을 뿐이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더러움을 막아주고 소중한 발을 보호해주면서도 늘 버려지는 신발처럼.

바보는 늘 버려져왔다. 부모에게서 버려졌고(물론 부모는 승룡이를 버리지 않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승룡이 혼자 남겨졌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봐주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동생 지인이(박하선)에게도 버려졌다. 영화가 굳이 그걸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버려진 바보, 버려진 신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친구였던 지호(하지원)와 상수(박희순)다. 지호(하지원)는 바보와의 재회에서 버려진 승룡이의 신발을 주워온다. 의사인 지호의 아버지는 승룡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늘 찾아와 문진을 해준다. 자신이 태워먹은 학교 피아노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쓰고 학교를 떠난 승룡이에게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수(박희순)는 늘 바보 곁을 맴돌고 기꺼이 자신의 신장을 승룡이의 동생에게 떼어준다. 그들은 바보의 맨발 같은 삶에 신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길거리에 버려진 더럽고 낡은 신발 같은 바보 승룡이의 마음이다. 바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 즉 덜떨어졌다는 부정적 의미와 착하다는 긍정적 의미는 작품에 의해 주목된 승룡이를 통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바보의 위대성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웃으며 선택하는 바보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지호는 비로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상수와 희영(박그리나)은 술집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토스트 가게와 은행안내원을 하게 되며, 동생 지인(박하선)은 새 생명을 얻게된다.

진심을 전하는 반복의 힘
영화가 바로 이 바보가 가진 진심의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반복되는 진술과 장면들을 통해서다. 바보는 많은 어휘를 알지 못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한다. 상수에게 “동생을 돌봐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할 때,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이 차츰 정색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반복의 문법을 통해 관객에게 진심을 말한다. 이것은 강풀의 만화가 가진 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풀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마디의 반복되는 말로 전하는 말의 힘을 아는 작가다.

학교에서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는 바보를 막아서며 당신 누구냐고 묻는 선생에게 “얘는 제 동생이구요, 저는 지인이 오빠 승룡이에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와서 바보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지인이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반복해서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라는 화답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의 힘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 아저씨의 승룡이네 집으로 신발을 던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인상적이다.

버려진 신발을 계속해서 주워와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고물상 아저씨와, 지인이의 반복된 진술은 모두 타인으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제 더럽고 비천하며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으로서만 치부하던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선입견은 이 즈음에 와서는 나의 오빠이자 나의 동생, 친구, 가족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지인의 대사와 고물상 아저씨의 장면은 세상에 버려진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비천한 사람들의 죽음이 사실은 바로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바보에게 빚진 당신의 삶
‘바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진짜 육체적인 장애를 겪는 바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매일 매일이 힘겹지만 불평 없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며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층적 차별의식에 차별 당하면서도 늘 이 땅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었던 우리네 착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숨쉬며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바보들, 승룡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삶을 빚진 그들에 대한 채무의식을 승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승룡이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거꾸로 우리가 승룡이에게 저지른 그 죄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낡은 신발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항변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는 버려진 그 신발들을 귀하게 주워서 주인에게 던져주는 영화 속 고물상 아저씨의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 그 버려진 것들에게 빚진 바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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