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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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는 왜 마돈나가 되고싶었을까

D.H.Jung 2006. 9. 7.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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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장사 마돈나>와 소수자의 문제

천하장사와 마돈나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거리가 존재할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이미지는 그러나 오동구라는 한 뚱보 소년 속으로 들어온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생각하지만 영화는 그것이 우리가 근거 없이 가졌던 편견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천하장사 마돈나는 천하장사와 마돈나, 남성성과 여성성, 소년과 기성세대, 꿈과 현실, 소수자와 다수자 등등. 전혀 한 테두리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대결구도를 보여 전혀 결합될 수 없다고 여겨지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편견에 의한 것이라는 걸 꼬집는다.

마돈나와 동구 사이
영화는 어린 동구의 허밍으로 시작된다. 도대체 무슨 노래를 하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아무렇게나 불러대는 그 노래는 마돈나의 ‘like a virg다. 그의 귀에는 헤드셋이 끼워져 있다. 그가 듣는 마돈나의 노래와 자신이 따라 부르는 ‘like a virgin’ 사이에는 이만큼의 거리가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마돈나가 되어 노래를 부르는 꿈을 꾸는 동구의 작은 방 한 켠으로 화려한 조명이 환상처럼 돌아간다. 동구는 꿈을 계속 꾸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런데 동구는 마돈나가 되기에는 너무 뚱보다. 살이 쪄 가슴이 나왔다는 것과 젖꽃판이 크다는 것 외에 동구가 마돈나와 닮은 점은 없다. 그저 평범한 여자가 된다고 해도 어울리지 않을 몸을 갖고 있다. 게다가 동구는 마돈나처럼 가녀린 여자가 아니다. 인천항 하역장에서 남들은 두 개씩만 올려도 힘겨워하는 짐을 다섯 개씩 올려도 끄덕하지 않는 괴력의 소유자다. 이렇게 우리가 가진 마돈나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동구를 앞에 세워놓고 의아해하는 관객에게 영화는 “그래서 뭐가 어쨌는데?”하고 반문하는 것만 같다.

영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동구의 힘을 앞세워 그의 마돈나가 되고픈 꿈을 포기하지 않게 만든다. 오동구는 여자가 되기 위한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상금이 걸린 씨름대회에 나가게된다. 도무지 그의 꿈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괴력(남성성) 또한 그의 꿈을 위해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오동구의 마돈나가 되려는 노력을 보면서 그 거리만큼 그의 강렬한 욕구를 읽게된다. 그런데 그것은 막상 동구에게는 그다지 거창한 꿈이 아니다. ‘무언가가 되고 싶다’며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단짝친구 종만에게 동구는 말한다. 나는 뭐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살고 싶은 거라고.

동구와 아버지 사이
그랬다. 동구에게 여자가 되는 것은 욕망이 아닌 생존이었다. 이야기가 존재의 문제로 확장되자 주변인물들이 여기에 호응하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거대한 포크레인의 등장과 그 앞에 선 동구는 이 영화가 얘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측면을 말해준다. 동구의 아버지는 동구에게는 앞으로 그가 살아가야 할 현실과 같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포크레인이며,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면서” 싸워야 버텨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현실 역시 동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아버지가 동구에게 휘두르는 폭력은 사실 꿈을 포기하고 뛰어든 저 노동현장에서부터 가져온 것이다. 편안한 가족의 품을 제공해줘야 할 집은 아버지가 밖에서 가져온 현실로 동구를 압박한다. 아버지의 훈계와 폭력은 사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대물림하지 않으려는 안간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아버지와 동구가 현실에 대응하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아버지는 권투의 꿈이 꺾이는 순간부터 더러운 현실과 마주한다. 주먹은 꿈을 위해 링 안에서 휘둘렀을 때에만 그 가치를 발휘한다. 현실은 주먹이 아닌 때론 교활하고 때론 비겁한 처세를 요구한다. 피해의식에 가득 찬 그의 주먹은 애꿎은 동구에게까지 향한다.
하지만 동구는 포기(그것은 생존이기에 포기할 수도 없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편안한 현실보다 힘겨운 꿈을 선택한다. 여장을 하고 아버지 앞에 선 동구에게 아버지는 현실을 요구한다. 아버지의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동구는 결정적인 순간, 아버지를 들어 날려버린다. 꿈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그는 모래판 위에 남을 수 있었고, 따라서 그의 괴력은 꿈을 위해 건강하게 사용된다.

동구와 아버지의 이야기에는 ‘아버지를 넘어선다’는 전통적인 통과의례적 의미도 담고 있다. 아버지가 가진 권위에 맞섬으로서 동구는 저 스스로 성인의 길로 들어선다. 그의 앞에는 아버지가 싸워왔던 현실이 놓여지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가드 올리고 상대를 주시하라”는 정도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워한다. 이 지점이 꿈과 현실에 대해 아무런 소통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아버지와 동구가 서로 만나는 지점이다.

동구와 씨름부 사이
아버지도, 사랑하는 일어선생님도, 가장 가깝다고 믿었던 단짝친구 종만조차 동민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철저히 소수자로서 혼자 살아가야 될 삶을 감지한다. 하지만 동구가 꿈을 이루기 위해 씨름부에 들어서는 순간, 그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씨름부원들과 감독을 만난 동구는 거기서 일종의 ‘소수자의 연대’를 느낀다. 말만 번지르르 하고 씨름은 뒷전에다 오히려 동구에게 춤을 배우려는 친구, 겨드랑이가 너무 민감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쓰러지는 친구는 물론이고, 설명은 없어도 출세와는 비껴있는 감독, 손이 터져라 연습해도 늘 지는 주장까지 모두 ‘다수자의 지지’에서 비껴난 소외된 인물들이다.

씨름부라는 남성적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동구가 쉽게 그들과 어우러지는 것은 그들이 이 같은 소수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덩치 큰 동구가 회식자리에서 날렵하게 춤을 추며 렉시의 ‘애송이’를 부를 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특히 덩치 트리오 중 문세윤이 연기한 덩치는 동구와 같은 여성적 감수성을 소유하고 있다. 그는 오히려 동구를 통해 자신의 감성을 하나하나 발견해나가는 듯 하다. 춤을 배우고 ‘요즘 내가 너 때문에 헷갈린다’고 할 정도로. 이 무거운 주제의 영화가 전체적으로 밝고 시종일관 웃음을 주는 이유는 바로 이 소수자들의 유쾌한 연대가 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만큼 먼 거리를 한 몸에 안은
영화가 말하려는 남성성과 여성성, 현실과 꿈, 소수자와 다수자의 거리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영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인천이라는 공간성에도 나타난다. 동구가 하역작업을 하는 노동의 현장인 땅과, 그 위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비행기가 떠있는 하늘, 그리고 동구가 소주를 마시는 차이나타운의 계단과 저 멀리 보이는,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는 배들 사이에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영화는 동구가 그랬던 것처럼 그것을 하나로 쓸어 담는다(이것은 류덕환이라는 놀라운 연기자에 의해 가능해졌다).

그리고 영화 끝에 우리는 무대 위에서 ‘like a virgin’을 부르는 동구를 만나게 된다. 이제 동구는 어린 시절 그 때처럼 혼자가 아니다. 객석을 가득 메운 사람들 중에는 씨름부원들도 있고 어머니도 있다. 영화는 여성이 되려는 동구의 문제부터 시작해서 차츰차츰 그 영역을 아버지가 맞닥뜨린 현실로 그리고 소수자들이 서 있는 현실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성적 소수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넘어서 우리 일상으로 파고든다. 남성성과 여성성, 소수자와 다수자 같은 양자의 대결구도는 무장해제 된다. 그리고 그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들은 타인이 아닌 바로 내 자신이라는 것을. (ohmy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