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집, 먹거리, 어쩌다 생활이 생존이 됐을까 본문

옛글들/생활의 단상

집, 먹거리, 어쩌다 생활이 생존이 됐을까

D.H.Jung 2008. 5. 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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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논리의 끝, 사람도 자연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아이의 하루를 생각해보는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생활을 파고드는 위해한 환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광우병의 위험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가 아이들의 급식으로 올려지는 건 아닐까.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걸리지는 않을까.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유전자 변형 옥수수를 모르는 사이 먹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한편 급증하고 있는 아이 성폭력 사건 사고에 재수 없이 휘말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인 불안감까지 걱정은 끝이 없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나은 것은 없다.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의식주를 두고 볼 때, 나아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먹거리와 집의 수가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 질적인 측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대량 소비의 길 위에서 가축들은 광우병 소, 구제역 돼지, AI 닭으로 땅에 묻히고 있으며, 채소들은 유전자 변형 옥수수, 농약 투성이 야채들로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생활은 오히려 서민들의 터전을 빼앗고 사는 집을 살(구매) 집으로 전락시켰다. 의복은 일견 과거보다는 그 상황이 낫다고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옷이 그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서 과시의 대상으로 변질되면서 외면에만 치중하는 정신적인 공백 상태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길은 없다.

이처럼 의식주에 있어서 그 질적인 저하를 피부에 실감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부족하고 가난했던 시절의 풍족함(?)을 그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개발이란 본시 그 초반에는 풍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족을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불편한 집들이 불도저로 말끔하게 밀어내어지고 그 위에 지어지는 아파트의 편리함이 주는 대가는 의외로 크다. 그 대가는 대부분 자연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과거라면 어디서나 쉽게 밟을 수 있던 땅을 밟기가 어려워진 현대인들은 그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시야를 저 끝까지 트이게 만들었던 낮은 집들 대신 세워진 고층건물들에 포위되어 있다. 아파트 한 채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자재들은 또한 다른 곳에서 포획된 자연 채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대가는 인간이 자연보다는 인공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자연 외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자연과 유리된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착각은 인간 자체를 포획 혹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이상, 개발 논리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편리함은 다른 누군가의 불편함 때론 죽음이 되기도 한다. 즉 개발 논리의 끝은 결국 그 대상을 거기 살아가는 사람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숙고되어져야 할 사안이다. 자연적인 흐름의 강줄기를 개발자의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사고방식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하겠다는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거기 사는 생명들에 대한 고려가 부재하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장기적 안목 없이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벌이는 정책적 결정이란 이제 밖을 나돌아다니기조차 불안해진 아이들의 현재처럼,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까지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도 점점 생활을 생존으로 만들어 삶의 질을 끝없이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그저 먹고 잠자고 거리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대단할 것 없는 생활이 아닌가.

아파트 개발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주거의 양극화를 경험한 것처럼, 위생이 불분명한 먹거리의 무분별한 수입허가는 먹거리의 양극화 나아가 건강의 양극화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양극화를 육체화시키는 이 과정은, 이제 개발의 논리가 우리네 몸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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