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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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생활의 단상

굴다리를 지나면서

D.H.Jung 2005. 9. 15.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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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에는 백수의 왕이 산다.
예전 우리 와이프를 만나게 해줬던 시나리오 쓰던 학원에서 만난 그 선배는
당시 건축디자인회사의 부장이었다.
공간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비롯된 그의 영화보기는
영화 속의 공간보기의 재미로 이어지다가
결국 영화판에 뛰어보겠다고 시나리오 학원에 들어왔던 것.
나이 40이 넘어서 누가 보면 대단한 용기라고 하겠지만,
선배에게는 대수로운 일이었다.

회사 때려치기를 밥먹듯 하면서 동남아 매니아였던 선배는 필리핀으로 싱가폴로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를 전전하며 살았다.(여행이 아니고)
그러다 갑자기 국내에 들어오더니 글을 쓰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 경북 상주 오지에 안다는 민박집을 소개해줬고(그때는 집도 없었으니까)
배낭에 원고지 한 다발, 볼펜 한 박스 들고 상주 오지로 들어갔던 거디었다.

오지라고 해도 정말 너무한 오지였다.
민박집에서 동네 구멍가게까지 가려면 15분은 걸어야 할 정도였으니까.
눈이라도 오면 담배도 술도 비자발적으로 끊어야 할 판.
선배의 말로는 정말 하루가......조용했다고 한다.
선배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글을 쓰려면 술과 담배를 해야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 둘도 끊으려고 오지로 들어간 것이었지만,
그게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일까.
선배는 똥마려운 토끼처럼 산과 들을 따라 헤매면서 결국 그 구멍가게를 찾아냈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구멍가게를 찾았다.
처음에는 혼자 술과 담배를 사다놓고 민박집에서 마셨다.

그런데 어느날 밤이었다.(밤도 아주 깊은 밤)
소주가 막 떨어져 구멍가게로 갈까 말까 고민하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자신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지만 왠지 반가웠다고 한다.
문을 열었더니 구멍가게 하는 할머니가 소주 한 병과 오징어 한 마리를 들고
같이 한잔 하겠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선배는 그 후로 할머니와 소주를 마시곤 했다.

민박집에는 정신박약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뒷산에 올라갔다가 그 아들을 만나 기절초풍할 뻔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꾸물꾸물 겨울 날들은 지나갔고
소주와 담배는 그토록 많이 마시고 피워댔지만 원고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새겨지지 않았다.

겨울이 가고 여름이 왔다.
돈도 슬슬 떨어지고(정말 싸게 지냈다고 한다...)
민박집을 찾는 젊은이들도 조금씩 늘어났다.
그런 기미를 알아챈 민박집 주인이 눈치를 주기 시작하자,
선배는 알아서 젊은이들의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사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같이 젊은 애들이랑 어울려 술을 먹기 시작했고,
술이 떨어지자, 자기가 알고 있는 구멍가게에 가서 소주를 사다 준 것이 계기가 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자, 어느새 선배는 민박집 하인이 되어 있었다.
그 민박집을 소개해준 선배의 친구가 찾아왔다.
그래 글은 잘 되나? 선배는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렇게 선배는 친구에게 멱살잡혀 산에서 끌려내려와
친구의 소개로 건축디자인회사에 다시 들어갔다.

그리고 시나리오 학원을 다니면서 영화 시나리오를 썼다.
나랑 같이 쓴 시나리오도 있는데...<99-1 비>라는 요상한 제목의 시나리오다.
99-1번 버스와 비가 주인공인 이 영화는 비만 오면 활기를 띠는 종점사람들의 이야기다.
결국 노선을 벗어난 버스가 저수지로 추락한다는 그렇고 그런 얘기...

그 선배는 결국 건축디자인회사도 때려치웠다.
그리고 안산에 칩거한 지 벌써 6년 째...
시나리오는 안쓰고 안개비라는 돈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www.angeb.com을 들어가보기 바란다.)

가끔 그 집에 놀러가 노래를 듣는다.
그 선배는 젊은 시절, 이대 앞에서 락카페(락음악이 나오는 카페)를 운영하기도 했던지라(마광수 교수의 여성편력을 다 알고 있더라), 집에는 판이 많았다.

일 안하고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그 선배를 통해 알게되었다.
그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조금씩 아르바이트 하고 그걸로 연명하지만,
본인은 만족하는 그런 삶말이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선배는 거의 알코올 중독 수준이고, 결혼은 포기상태다.
외로워 죽을 지경이라 한다...)

그 선배가 찍은 사진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 바로 위에 있는 굴다리 사진이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대학시절 굴다리도 생각나고
흔들리는 폼이 선배가 이 사진을 찍었을 때의 모습도 연상되고
또 연말에 보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한다.

또 한 해가 가는 구나, 하는 그런 기분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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