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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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생활의 단상

꽃피는 봄이 오면

D.H.Jung 2005. 9. 15.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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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국문과 출신 후배(와이프 친구)가 프로듀싱한 영화라고 해서
이 영화를 봤었다.
그 친구하고는 옛날에 8미리 단편영화를 한편 같이 만들었었다.
(물론 의욕만 많았고 중간에 카메라가 맛이 가는 바람에 중도하차했지만)

여하튼 그 때 그 녀석은 연극을 하고 있어서
소주 한 잔으로  주인공으로 캐스팅 했었다.
나는 녀석이 연극으로 밥벌어 먹고 살 줄 알았다.
하지만 왠걸? 여러 회사들을 전전하다가
결국은 영화 기획사 들어가서 프로듀서를 하고 있다.
늘 함 보자는 말만 하고 한번 보질 못했다.
녀석도 바쁘고 나도 바빴으니까...

이 영화에서 최민식이 뭐 이런 얘길 했던 거 같다.
"나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어..."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일어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최민식은 이런 다시 해보고 싶다는 투의 배역이 잘 어울린다)

영화는 사실 별로 재미없었다. 단지,
흥미로운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최민식의 트럼펫을 훔쳐 가출한 꼬마가
해변에 앉아 있는데, 우연하게도 최민식과 별로 잘 되지 않는 옛 애인이
꼬마를 만나 트럼펫을 연주해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꼬마는 최민식에게서 배운 그의 음악을 들려주고
그 음악 속에서 옛애인은 무언가 마음의 변화를 겪는다.
더 재미있는 건, 그 때 최민식도 근처에서 술을 먹고 있었는데,
꼬마가 연주하는 음악을 어렴풋이 듣는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다시 해보고 싶다, 는 생각은 잘못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걸 부정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사실 누구나 다 매일 처음이라는 걸 잊고 있는 것이니까.
지금까지가 아니라, 지금부터다.

지금부터 꼬마를 만나고 꼬마에게 악보를 건네주고 라면도 같이 끓여먹어야
옛애인에게 그런 우연한 감동도 선물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 녀석, 이번 영화도 별로 재미를 못봤다.
듣기에는 매일 밤 술로 지낸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야 임마! 그건 연극에서나 어울리는 대사톤이야! 이건 영화라구! 과장하지 말란 말야!'
소주 한 잔으로도 이렇게 야단치고, 그 야단에 바짝 긴장하던 녀석은
또 어떤 영화를 준비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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