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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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아버지, 뿔이라도 내보세요

D.H.Jung 2008. 6. 1.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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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아버지들, ‘되고송’을 불러라

아버지는 늘 한 자리 물러나 앉아 계셨다. 다들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함께 놀러갈 때도, 심지어 저녁에 모처럼 모여 TV를 볼 때도 늘 한 자리 뒤쪽에 앉아 계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우처럼 보였다. 특별대우 말이다. 하지만 퇴직 전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 중 누가 말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실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자기 삶을 늘 뒷전에 두고 계셨던 아버지는 새삼스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못내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늘 뒷전에 있는 아버지에 익숙해진 가족들의 관성은 아니었을까.

이른바 아버지 수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의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젊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산업의 현장에서 밤낮 없이 일했고, 이제 그 결실을 얻어야 할 나이에 IMF를 맞았다. 평생 등골 휘게 살아온 대가로 돌아온 보상이라곤 구조조정으로 일찌감치 명퇴한 아버지가 앉을 뒷전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던 아버지, 그 자리에 자신이 와 있건만 자꾸 뒤로 밀려나면서 가슴 한 편에 남는 공허함은 도대체 뭘까. 권위의 끝자락에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엄마가 뿔날 때, 아버지는 왜?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엄마 김한자(김혜자)다. 제 맘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김한자는 자식 하나 하나가 미덥지 못하다. 참다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김한자는 결국 뿔을 낸다. 엄마의 뿔은 온 가족을 비상으로 몰고 간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뿔을 가라앉힐까 고민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어떤가. 같은 부모 입장이 다를 리 없겠지만 나일석은 그 와중에도 아내 김한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바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아내를 뿔나게 한 자식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늘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 몸에 밴 습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서 위로 눈치보고 아래로 눈치보며 살아왔던 세월의 흔적은 아닐까.

이렇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마인 김한자는 축복 받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뿔나는 일이 있어도 늘 살뜰히 신경 써주는 남편이 있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멋진 시아버지(이순재)가 있다. 게다가 시누이(강부자)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격이 없고 친근하다. 이 뿔난 엄마네 가족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쓸쓸한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낮이면 세탁소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가 저녁이면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바로 그 존재다.

엄마의 세상, 지워져버린 아버지들
요즘은 이른바 엄마의 세상이라고 한다. ‘엄마마케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까지 엄마의 파워는 그만큼 강력해졌다. TV드라마는 바로 이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최근 들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아줌마드라마의 배경 역시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들은 서민적 삶이 주는 끈끈함을 체험하다가(엄마가 뿔났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상쾌한 복수를 하고(조강지처클럽), 상류층의 삶을 대리경험(행복합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아줌마 신데렐라(천하일색 박정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왜소해지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이나 ‘온에어’의 서영은(송윤아)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싱글맘이고, ‘행복합니다’에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선택받는 신데렐라거나(이준수, 이훈역), 아이까지 갖게 하고는 도망친 남자거나(박상욱, 이종원역), 그 버려진 아이까지 떠맡아 기르려는 남자이거나(이용재, 김철기역), 죽은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이철곤, 이계인역)들이다.

아버지들이여 ‘되고송’을 불러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 두면 되고, 견디다보면 또 월급날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통신사의 ‘되고송’. 특유의 긍정어법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 가사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면 ☆되고’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면’의 ○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고, ‘☆되고’의 ☆는 그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 가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안 좋은 상황들은 하나하나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쐐기를 찍듯이 후렴구처럼 ‘생각대로 하면 되고’로 끝나면서 ‘모든 건 생각에 달렸다’고 되짚는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제 이 달라진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정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책하면서 뒷전을 찾아 서는 아버지들의 진짜 자리를 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잊고 있던 꿈이라도 들춰내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 “회사 잘리면 내 생활하면 되고, 누가 뭐라면 그저 웃어주면 되고, 삶이 힘들면 잠시 쉬면 되고, 못 참겠으면 뿔 내면 되고,” 그렇게 되고송을 부르자. 뿔이라도 내보자.
(이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http://www.kaeri.re.kr/) 사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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