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대중문화 장악한 동성애, 어떻게 볼 것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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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장악한 동성애, 어떻게 볼 것인가

D.H.Jung 2008. 11. 24.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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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대중문화에 있어서 동성애는 이제 더 이상 금기가 아니다. 물론 동성애 코드와 동성애 컨텐츠는 다르다. 동성애 코드는 남장여자 같은 캐릭터가 등장해 동성애 같은 상황을 연출하지만 분명히 이성애를 다룬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미인도’같은 것이 그 부류다. 반면 동성애 컨텐츠는 게이들의 문제를 천착한 ‘후회하지 않아’나 최근 개봉한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같은 것들로 이들 컨텐츠들은 진짜 동성애자들이 캐릭터로 등장한다.

동성애 코드나 동성애 컨텐츠나 불문하고 바라보면 지금 대중문화 속에서 동성애라는 소재 자체는 과거처럼 음지에 숨겨진 그 무엇이 아니다. 특히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 이르면 동성애는 마치 공기처럼 일상적인 것으로 표현된다. 이 꽃미남 게이를 조연으로 세운 영화는 대중들에게 “넌 여자를 좋아해? 난 남자를 좋아해! 그게 어때서?”하고 묻는 것만 같다. 과거 무언가 진중하고 비극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했던 동성애라는 소재에 익숙한 대중들은 이 명랑발랄한 동성애 영화에 오히려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지금, 동성애가 대중문화 속에서 공기처럼 퍼져나가고 있을까. 그 첫 번째 이유는 이성애, 즉 이성 간에 벌어지는 멜로가 어느덧 식상한 어떤 것이라는 암묵적인 인식이 깔려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드라마에서 우려먹을대로 우려먹은 삼각 사각의 멜로나 신파조의 설정들은 이런 인식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한편 영화로서는 늘 연말이 되면 쏟아져 나오는 로맨틱 코미디가 그 역할을 했을 터이다.

이런 대중들의 인식 속에서 멜로가 아닌 인간애를 다루려고 하는 영상 컨텐츠는 때론 남녀의 출연을 꺼리기도 한다. 동성애를 다룬 것은 아니지만 본래는 남녀 주인공을 세우려했다가 결국 두 남자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준익 감독의 ‘라디오 스타’는 그 대표적인 사례다. 이준익 감독은 이미 전작 ‘왕의 남자’에서도 두 남자의 동성애를 끌어들여 예술혼과 인간애로 컨텐츠가 가진 주제를 확장시킨 전례가 있다.

동성애가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는 두 번째 이유는 남녀로 구분되던 성별구분이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진 사회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과거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 속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명확히 나눠져 있었다. 그것은 육체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하던 농경사회에서의 성별 역할의 차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육체적인 노동력이 아닌 정신적인 노동력을 사용하는 정보사회에서는 남녀의 역할구분이 사라진다. 오히려 여성들의 노동력이 섬세한 정보사회의 업무에 더 적합해진다.

남녀 구분은 이제 남성성과 여성성의 구분으로 바뀌게 된다. 남자라도 여성성이 많은 사람이 있고, 여자라도 남성성이 많은 사람이 지금 시대에 남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다. 동성애는 바로 이 시선 속에 자연스러움을 얻게 된다. 남성이지만 강한 여성성이 실제 생물학적 성까지도 변모시킨 존재로서 동성애자는 외계인이 아닌 우리들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일이지 실제 사회의 변화는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생각해봐야 할 것은 특히 금기시되었던 남자와 남자 간의 동성애가 최근 들어 눈에 띄게 많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아무래도 문화구매자들로서의 여성이라는 존재의 위상이 그만큼 커진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등장하는 남성들이 모두 꽃미남들인 점은 과거 여성들의 성 상품화가 이제는 남성들까지 포함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대중문화를 장악한 동성애는 그저 자극적인 소재가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점점 중성화되어 가고 있는 사회를 보여주는 지표인지도 모른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