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성공한 시청률, 실패한 드라마, ‘주몽’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성공한 시청률, 실패한 드라마, ‘주몽’

D.H.Jung 2006. 10. 13. 2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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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몽이 처한 딜레마

요즘 시청률로 가장 성공한 TV 컨텐츠는 단연 MBC 월화 사극, ‘주몽’이다. ‘고구려사극 전성시대’라 할 만큼 연이어 경쟁작으로 등장한 ‘연개소문’, ‘대조영’에도 불구하고 시종 43%대에 이르는 독보적인 시청률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시청률은 드라마를 평가하는데 있어서 유용한 잣대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시청률이 높은 것과 드라마적인 성공은 다른 차원이다. 다시 말해 ‘주몽’의 시청률이 높은 것으로 드라마 ‘주몽’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가려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거대한 고구려, 영웅, 사랑은 어디 갔나
모든 드라마에는 저마다의 목표 혹은 기획의도가 있기 마련이다. 많은 이들이 이 기획의도는 의도일뿐, 실제적인 목표는 시청률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것은 각종 연예관련 기사들이 만들어낸 ‘시청률 지상주의’가 낳은 폐단이다. 드라마는 드라마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그것이 잘 전달되어 호응을 얻을 때 좋은 드라마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몽’이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주몽’의 기획의도를 보면 그 키워드는 ‘거대함’이다. ‘거대함은 이제부터 시작이다’라는 제목 아래, ‘오늘보다 거대한 고구려를 만난다’, ‘신화보다 거대한 영웅을 만난다’, ‘역사보다 거대한 사랑을 만난다’라는 소제목이 달려있다. 이 소제목들에서 방점은 ‘고구려’와 ‘영웅’그리고 ‘사랑’에 있다. 물론 기획의도라는 것이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 방점 찍힌 키워드들은 드라마의 커다란 방향성을 지시하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제 막 40회를 넘기고 60부까지 20회를 남긴 드라마 ‘주몽’ 그 목표점들은 지금 어디까지 와 있을까.

고구려의 실종 - 역사를 버리자 고구려도 사라지다
먼저 ‘고구려’라는 역사적 방점은 퓨전사극의 기치를 내걸었을 때부터 실종되기 시작했다. 사료가 없어 상상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퓨전사극’이라는 타이틀이 모든 걸 덮어주는 마법의 지팡이가 될 수는 없다. 기왕에 고구려를 내세웠다면 기본적인 사료는 따라야 마땅하다. 철기의 문제는 드라마의 재미로 치더라도, 당대 한사군이 있던 위치를 한반도 내로 지정하는 등의 문제는 심각한 식민사관을 고스란히 반영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기본적인 사료를 버리고 확고한 사관 또한 없이 역사극을 만들려했다면 그것이 ‘퓨전사극’이라 하더라도 ‘고구려’라는 타이틀을 붙이지 않았어야 마땅하다.

역사적인 인식의 문제를 떼놓고 보더라도 지금의 ‘주몽’에는 고구려가 실종된 지 오래다. 한민족이라면 특별할 수밖에 없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을 그리면서 드라마의 3분의 2가 지나간 현 시점까지 주몽이 고작 하고 있는 것은 권력투쟁과 연애이다. 물론 연애야 드라마의 재미를 위한 것이라지만 고구려의 탄생을 같은 민족끼리의 권력투쟁의 소산으로 보여지게 만든 것은 어딘지 잘못된 일인 것 같다. 국가 탄생의 또 한 축이 될 수 있는 ‘고조선’이라는 대의명분과 유민들을 규합해가는 이야기가 ‘주몽’에는 잘 보여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됨으로써 ‘주몽’은 굳이 ‘고구려’나 ‘주몽’이라는 타이틀을 떼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드라마가 되었다. 그러자 거대함은 사라지고 아기자기한 잔재미들만 잔뜩 이어진다. 잇따른 납치와 탈출, 구출의 연속, 국가 간의 부딪침에 전쟁은 없고 소소한 전투들만 이어지는 것 등은 바로 그런 결과들이다. 심지어는 전쟁에 있어서도 이해할 수 없는 규모의 병력이 등장하는 스케일의 문제가 불거진다. 작가와 연출자는 매회 쫓기듯 찍어야만 하는 우리나라의 드라마적 풍토로 변명하지만 이것은 엄연한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드라마는 마치 대충 몇 명의 전투 제스처를 하고 나서는 나머지는 시청자들이 상상해서 전쟁으로 채워 넣으라는 것만 같다. 현재 같이 진행되고 있는 타 사극들이 사전제작을 했기 때문이라고 변명한다면, 그것 역시 이 드라마가 애초부터 그 정도의 계획도 없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자인하는 일이다.

영웅의 실종 - 캐릭터들의 구조조정 시작되다
‘주몽’의 힘은 캐릭터 주몽에서 나올까. 한번쯤 의심해볼 만한 부분이다.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점점 성장해간다. 그 캐릭터에 시청자들은 차츰 감정이입이 되고 그러면서 드라마의 공감의 폭이 넓어진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캐릭터 자신이 아닌 주변 캐릭터에 의해 주인공이 부각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런 부류에 속한다. ‘하늘이시여’에서 왕모와 자경이 관심을 받은 것은 자신들 캐릭터의 힘이라기보다는 악역들에 의한 부분이 많다. ‘소문난 칠공주’에서 불쌍한 칠공주들이 조명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대책 없는 캐릭터와 합쳐져 그들을 억압하는 기성세대의 틀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양상은 주몽에 있어서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처음 주몽이 캐릭터로서 주목받게 된 것은 본인의 의지가 아닌 ‘해모수’와 ‘유화부인’이라는 굵직한 캐릭터에 힘입은 바가 크다. 주몽의 성장에 있어서 또 한 축을 차지하는 ‘소서노와 연타발’, 그리고 ‘마리, 협보, 오이 삼인방’, 게다가 모팔모, 여미을, 심지어는 금와왕까지 주몽을 돕는다. 이유는? 그가 해모수와 유화부인의 아들, 주몽이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그가 드라마상에서 주몽이라는 이름으로 나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주몽은 그다지 소위 말하는 캐릭터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반면, 악역을 맡고 있는 대소, 영포, 도치 일당 등은 드라마의 진짜 재미를 주는 인물들이다. “드라마 제목을 주몽이 아닌 대소로 바꿔라”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주몽이 실종되었던 2회분 동안 대소는 그 역할을 충분히 해주었다.

영포와 도치 일당은 ‘주몽’이란 드라마가 만들어놓은 가장 독특한 재미를 가진 캐릭터들이다. 이들 ‘귀여운 악당들’은 사실상 지금까지 드라마의 흐름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 주몽의 성장은 바로 이들의 패배에 의한 경우가 많으며, 이들은 그만큼 어리숙하다는 점에서 시청자들에게 호응까지 받고 있다. 악당들 이외에도 소서노와 연타발이란 캐릭터는 주몽 이상의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들이다(사실상 드라마 상에서 주몽은 초창기에는 유화부인 품속에서 중반부에는 소서노의 품속에서 노는 아이 정도로 비춰진다).

이렇게 주몽의 캐릭터가 전면에 등장해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이 되지 못하고, 주변인물들이 불쑥불쑥 제 자신의 힘을 드러내자 문제가 생긴다. 드라마의 애초 목표, ‘고구려와 주몽의 탄생’이라는 갈 길은 멀기만 한데 자꾸 그들 캐릭터 사이에서 맴을 돌게 되는 것이다. 마치 초기에 부영의 캐릭터가 전혀 드라마 흐름에 도움이 되지 못하자 사라져버린 것처럼, 최근 ‘주몽’에는 캐릭터들의 구조조정이 시작되었다.

금와는 침상에 눕게 되고, 유화부인 역시 아들을 걱정하는 모습 이상의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 소서노는 우태와 결혼한 후, 매력을 잃게 되고, 연타발은 비류군장에 의해 끌어내려진다. 예상밖에 호응을 얻고 있는 영포와 도치일당은 아직 정해지진 않았으나 ‘영포의 난’을 실패로 어떤 상황이 될지 알 수 없다. 반면 예소야라는 새로운 캐릭터가 등장했으나 아직까지 이렇다할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주몽의 힘은 바로 이런 주변인물들에 의해 나온 것이었는데, 그들을 놔두자니 드라마의 진행이 문제가 되고, 그렇다고 없애자니 드라마의 재미가 사라지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랑의 실종 - 소서노, 울기 시작하다
‘주몽’의 가장 큰 인기의 힘은 바로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오가는 멜로가 한 축을 차지한다. 이것은 타 사극에 비해 ‘주몽’만이 가진 힘이다. 남성적인 전쟁과 전투, 권력다툼의 문제 속에 ‘주몽’은 여성적인 멜로 라인을 섬세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일등공신은 당연 소서노라는 캐릭터다. 그녀가 힘을 발휘한 이유는 단 하나, ‘강인하고 당찬 여성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그저 한 사람에 목이 매어 기다리기만 하는 캐릭터였다면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주몽을 구해내기 위해 산적들에게 스스로 들어가 거래를 할 정도의 강단을 가진 인물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실종된 주몽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소의 협박에 휘둘리면서 우태와 혼사를 치러버린다. 왜 작가는 이런 선택을 했던 것일까. 이것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 소서노가 차지하는 비중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가, 뒤늦게 역사적 사료에 충실하고자(사료에서는 소서노가 유부녀로 주몽이 유부남으로 만난다) 했던가, 앞으로 진행될 예소야와의 멜로 경쟁(경쟁이 되려면 힘이 균형이 되야 하는데 소서노가 너무 강하므로)을 만들려던 데서 비롯된 일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되자 소서노는 그 유리같이 냉랭하지만 매력적인 미소를 잃어버리고 울기 시작한다. 소서노의 매력은 떨어지기 시작한다.

반면 예소야는 참신하지 못한 등장으로 처음부터 힘을 얻지 못했다. ‘주몽’에서의 멜로라인은 대개 ‘영웅의 위기 - 위기에서 구해준 여인 - 위기에 처한 여인 - 여인을 구해준 영웅’이라는 구조로 등장하는데, 예소야 역시 드라마 초기의 해모수의 등장과 거의 똑같은 구조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녀에게서는 소서노와 같은 카리스마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일부종사 하듯 주몽을 바라보며 어찌 보면 짐만 되는 캐릭터에서 매력적인 구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소서노의 힘도 약화되고 예소야도 힘을 발하지 못하는 이 상황에서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주몽이 살 수 있는 길
최근 ‘주몽’의 흐름은 앞에서 지적한 기획의도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시청률 중심으로 흐르고 있다. 아무리 주몽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주인공을 2회분이나 드라마에서 뺀 것이라든지, 몇몇 예고편으로 주목을 끌어놓고 실제 보면 별 것 아닌 스토리로 일관한다든지, 심지어는 방영시간을 마음대로 늘린다거나, 상식을 무시한 채 무리한 편성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은 시청률 편향을 드러내는 단적인 예다. 만일 ‘주몽’의 목표가 애초부터 시청률에만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민감한 시기에 그것도 국가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주몽이라는 소재를 갖고 시청률에만 올인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이러한 ‘주몽’에 대한 비판이 끊이질 않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저 시청률에 경도되지 않고 끊임없이 애정을 갖고 ‘주몽’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이 많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몽’은 이제 작가 스스로도 “작품의 밀도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며 몇몇 실패사례에 대해 인정했을 정도가 되었다. 드라마 비판에 대한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드라마 초기에 방점을 찍은 키워드들이 실종된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 역시 초심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필자를 비롯하여 ‘주몽’이라는 드라마에 여전히 애정과 관심을 보이며 비판을 해주고 있는 많은 시청자들에게 보답하는 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