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불황이면 막장이라도 된다는 위험한 생각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불황이면 막장이라도 된다는 위험한 생각

D.H.Jung 2009. 1. 10. 0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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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운명’종영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

말도 많고 탈도 많아 막장드라마라고까지 불렸던 ‘너는 내 운명’이 종영했다. 종영에 즈음에 이 막장드라마의 성공방정식을 분석하는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개중에는 욕을 먹었어도 성공은 성공이라는 생각들이 있는 모양이다. 그리고 그 판단의 기저에는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불황에 즈음한 관대함(?) 같은 것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너는 내 운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TV의 시청률 지상주의는 늘 있어왔던 것이지만, 이처럼 노골적으로 시청률만을 겨냥한 막장드라마들이 창궐한 적은 없었다.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설정과 캐릭터들을 극단적인 감정대립으로 몰고 가는 방식으로 시청자들을 중독시키는 이 막장드라마들은 이제 창피해하기는커녕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다니는 실정이다. 이유는? 40%에 육박하는 시청률 때문이다. 시청률에서 성공했으니 욕을 먹어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연실 TV는 불황을 외친다. 불황이니까 이런 극단적인 상업적인 선택을 이해하라는 듯이.

그런데 과연 시청률이 되기에 욕먹어도 그만이고, 또 불황이어서 이 선택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합리적인 생각일까. 시청률이란 양적인 잣대로서 TV가 시청자를 호명하는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즉 시청률에는 대중들 개개인의 성향이나 그 프로그램을 보는 각각의 이유 같은 질적인 판단기준은 빠져있고 그저 뭉뚱그린 수치만이 존재한다. 시청률 40%라고 얘기할 때 그것은 실로 애매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많이 봤다”는 그 수치의 의미는 “어떻게 봤다”는 의미 따위는 상쇄되어 있다.

그러니 가치판단이 빠진 이 시청률의 세계에 들어가면 욕을 먹든, 중독적이든, 자극적이든, 상관이 없다. 수치만 높으면 그만인 것이다. 수치를 높이는 방법은 간단할 수도 있고 꽤 어려울 수도 있다. 만일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가 프로그램의 질을 생각하면서 수치를 생각한다면 이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하지만 오로지 양적인 수치만 높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그것은 의외로 쉽다. 욕먹는 것까지 감수한다면 사실 못할 게 없어진다.

드라마는 꽤 오랜 경험들이 축적되어 있는 장르다. 따라서 과거 시청률에 영향을 미쳤던 공식적인 설정들을 그저 끌어오는 것만으로 일단 기본을 만들 수 있다. 그 기본 위에 좀더 극단적인 인물들 간의 대립구도를 만들어낸다면 시청률은 더 치솟아 오른다. 막장드라마의 기본 구조가 가족극에 복수극을 끼워 넣는 것은 이것이 용이하기 때문이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극 만큼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분야는 없다. 이미 신파극에서부터 우리는 그 가족극의 성공 코드들을 갖고 있었고, 이것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까지도 가족극의 ‘기본’을 만들어준다.

가족극에 붙여지는 복수극은 가족극의 상황을 극단으로 만들어내는 장치가 된다. 유치하게 보일지 몰라도 권선징악의 이야기 속에는 늘 가족과 복수가 근간을 이룬다. 가족극의 틀 속에서 남녀 간의 사랑과 배신 혹은 가족 간의 대립구도가 점차 발전해나가서 끝장까지 이르게 되면 복수극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 가족극과 복수극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극단적인 대립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에 불과하다. 주제의식 같은 것은 애초에 없고, 오로지 시청률을 끌어 모으기 위한 클리셰들의 반복만이 거기에는 존재한다.

그런데 왜 보냐구? 그게 거기 있으니까 보는 것이다. TV는 이제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한 구석에서 틀어져 보여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매체가 되었다. 그러니 왜 보냐고 묻지 말고, 왜 그게 거기 있느냐고 물어봐야 한다. 왜 꼭 그렇게 노골적이고 막장으로 가는 드라마가 거기 자리하고 있어 무심코 바라보던 시청자의 눈을 중독시키는가를 물어봐야 하는 것이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 고공행진을 하고 있고, 욕하면서도 본다는 기사가 나올 때마다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그 시청률이라는 잣대가 자꾸만 아무 상관없는 시청자들까지 호명하기 때문이다. 시청률 40%를 내세워 마치 시청자들 대부분이 그것을 인정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 순간, 그 시청률에 포함되는 시청자들이라는 익명의 덩어리들 속에 자신까지 갑자기 불려지는 그 불쾌한 기분. 불황이라는 말을 마치 주문처럼 읊어대며 막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그 당당하지 못한 태도는 막장드라마의 유혹을 뿌리치고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장차 미래의 TV를 책임질 많은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불황이니까 막장드라마도 된다고? 아니다. 막장드라마가 가진 당장의 달콤함은 계속 되어질 더 큰 불황을 가져올 뿐이다.